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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방방곡곡

노량대교 건너 남해 충렬사(노량 충렬사)와 왕지 벚꽃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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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사당인 남해 충렬사를 찾아갑니다.

 

남해에 가려면 일단 하동 끝자락에서 노량대교를 건너야 합니다.

 

노량대교는 2018년 9월 개통했는데

건설 당시에는 제2남해대교라고 불리다가 개통할 때 노량대교라는 이름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남해대교는 1973년 개통한 연륙교로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와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사이를 연결합니다.

다리 양쪽에 있는 마을 이름이 똑같이 '노량'이네요.

 

노량하면 뭐다?

이순신 장군이 퇴각하는 왜군을 깨부수다 순국하신 그 전투,

노량해전의 현장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 중인 1598년 11월 19일 돌아가셨는데

한동안 그 시신을 남해 노량리, 지금의 충렬사 자리에 모셨습니다.

 

그 후 고금도를 거쳐 외가동네인 아산으로, 지금의 현충사 자리에 안장했지요.

 

사당이 처음 세워진 것은 인조 11년(1633)으로

김여빈, 고승후 등의 유림들이 충무공의 묘가 있던 터에 작은 집을 짓고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충무공이 순국한지 60년이 되던 효종 9년(1658)에 새로 사당을 지었습니다. 

 

그 후 현종 4년(1663)에 통영 충렬사와 함께 사액을 받았습니다.

임금이 사당의 현판을 내려 준 겁니다.  

 

통영 충렬사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은 선조 39년(1606) 조정에서 세운 사당으로

남해 충렬사보다 규모가 훨씬 큽니다.

 

우리나라에 충렬사라는 이름의 사당은 꽤 많습니다. 

국어사전에 "충신열사를 기리고 추모하고자 세운 사당"이라 뜻풀이가 나오는 걸 보면

충렬사는 일반 명사로 쓰이는 듯합니다.

 

그 중에서도 남해 충렬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충의와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 되시겠습니다.

 

사당이 있는 곳이 노량마을이라 그런지 노량 충렬사라고도 합니다.

 

 

남해대교 아래쪽에 유람선 선착장과 횟집들이 늘어서 있고 

그 한쪽끝에 야트막한 산기슭에 기대어 남해 충렬사가 서있습니다.

 

남해 충렬사 바로 앞에는 주차장이 따로 없고

충렬사와 200m 쯤 떨어진 곳에 제법 넓은 무료 공영 주차장이 있습니다.

남해대교 유람선 선착장, 식당가, 충렬사 등 노량마을 전체를 아우르는 주차장인 듯합니다.

 

먼저 관리사무소 건물이 보이고 그 옆에 무대(?)인 듯한 공간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뭔가 행사가 있을 때 사용하는 거겠지요?

나름 거북선 모양을 차용했습니다.

 

 

관리사 앞쪽의 충렬사 안내도

 

 

충렬사 앞에서 바라본 노량대교와 남해대교

붉은색 주탑이 남해대교입니다.

 

 

관리소 맞은편에는 거북선이 바다에 떠있습니다.

옛 기록을 참고해서 1980년 해군에서 재현한 것인데

해군사관학교에 전시하다가 1999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다 합니다.

 

 

전시관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관람료는 500원이군요.

개인, 단체 구분없고, 성인과 어린이 구분도 없이 일괄 500원입니다.

 

 

요즘 세상에 500원이 무슨 가치가 있나, 차라리 무료로 하지 싶을 수도 있지만

관심없는 사람은 굳이 500원을 내면서 들어가보진 않을 테니

의미없이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것보다

정말 관심있는 사람만 들어가보는 효과는 있을지도요. 

 

오래전 답사를 왔을 때 들어가 본 것 같은데.....별 기억이 없네요.

 

 

 

이제 충렬사로 들어가 봅니다.

관리소에서 직진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돌아서 들어갑니다. 

 

거북선 전시관은 입장료를 500원 받지만, 남해 충렬사 입장료는 무료입니다.

 

노량마을 끄트머리 주택 옆에 웬 비석이 보입니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척화비입니다.

 

 

척화비는 조선말 흥선대원군이 서양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세운 것입니다.

 

큰 글씨로 새겨진 글자는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양이침범비전즉화주화매국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작은 글씨로 새긴 내용은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

"우리들의 만대자손에게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입니다.

 

충렬사 외삼문으로 가기 전 또 비석 두 기가 서있습니다. 

 

 

충렬사 안내도에는 자암 김구비라고 되어 있지만 전혀 다른 두 비석입니다.

 

 

빗돌 위쪽에 지붕 모양을 얹고 있는 것이 자암 김구비입니다.

빗돌에 '자암김선생적려유허추모'라 쓰여 있습니다.

 

 

김구라는 이름을 들으면 '백범'부터 생각나는데, 이 분은 그 분이 아닙니다^^

조선 성종 때 태어난 분으로 중종 때 조광조에 의해 발탁되어 32세에 홍문관 부제학에 올랐다 합니다.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남해에서 13년간 유배생활을 하셨다는군요.

남해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화전별곡>이라는 경기체가를 지으셨다는데....들어본 기억은 없네요.

자암 김구의 6대손인 김만화가 남해현령으로 재직하던 숙종 32년(1706)에 세운 비입니다. 

 

빗돌 위쪽에 용머리 조각을 새긴 비는 삼도통제사 이태상비입니다.

몸돌에 '가선대부삼도통제사이공태상지비'라 쓰여 있습니다.

가선대부는 조선시대 종이품의 관리에게 주던 품계 이름입니다.

 

 

용머리 조각이 딱히 뛰어난 건 아닌데 선은 굵으면서 왠지 귀여워 보여서..........^^

 

 

외삼문 앞에서는 봄단장을 하는지 가지치기가 한창이더군요.

 

 

외삼문을 들어서기 전 한글로 쓴 비가 보이는데,

1948년 정인보가 쓴 충열사비라고 합니다.

 

 

충열사비 옆으로 청해루라는 현판을 단 건물이 있습니다.

사단법인 남해충렬사 간판이 걸려 있어서 현대에 지은 관리동인가 했는데

이순신 장군의 5대손인 이태상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했을 때 이곳을 참배한 뒤 재실 공간으로 세운 것이라 합니다.

이태상은 외삼문 들어오기 전 서있던 비석의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자암 김구의 6대손이라는 표현도 그렇고, 

후손한테 5대손이라는 표현을 쓰면 어쩌자는겨?

조상을 헤아리는 '~대'와 후손을 헤아리는 '~손'은 숫자가 다른데요?

 

나를 기준으로 조상을 헤아릴 때는 고조할아버지가 4대조이지만

조상으로부터 후손을 헤아릴 때는 내가 고조할아버지의 5세손이 되는 식.

 

그러니까 이태상 통제사는 이순신 장군의 6세손인데 잘못 헤아려 5대손이라 한 건지, 5세손이 맞는데 5대손이라 잘못 쓴 건지 알 수 없네요.

 

각설하고,

외삼문을 들어서니 다시 내삼문이 나옵니다.

 

 

내삼문 앞에 동판(?)에 새긴 '남해충열사비'가 있는데,

원래 현종 2년(1661) 송시열이 지은 글을 한글로 풀어 놓은 것입니다.

 

 

노량해전 중 순국하신 충무공이 이곳에 잠시 묻혔다가 아산으로 옮겨 안장되었고, 그 자리에 사당을 짓고 충무공을 추모하게 된 내력 등이 적혀 있습니다. 

 

이 비와 조금 떨어진 곳에 충렬사중건비가 있습니다.

효종 9년(1658)에 새로 사당을 지으며 세운 비로 보입니다.

비 뒷면에는 중건을 담당했던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내삼문 앞에서 본 남해대교와 노량대교

 

 

내삼문을 들어서자마자 제법 큰 비각이 무척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방금 전 내삼문 앞에 있던 충열사비의 원문에 해당하는 충무이공묘비입니다.

현종 2년(1661)에 송시열이 글을 짓고 송준길이 썼으며

1663년에 통제사 박경지 등이 세운 것입니다.

 

 

빗돌 위쪽의 이수에 알록달록 색이 칠해져 있는 게 이채롭습니다.

색이 칠해진 이수는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다른 데 어디 또 있을까나?

 

 

비각 현판에는 補天浴日보천욕일이라 써있는데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이 쓴 것이라 합니다.

 

보천욕일은 하늘을 깁고 해를 목욕시킨다는 뜻입니다.

 

보천은 중국의 창조 신화 속 여신인 여와가 하늘의 이지러진 부분을 메웠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말이고,

욕일 역시 중국 고대 신화 속 인물인 희화가 해를 목욕시켰다는 전설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야말로 세상을 새로 만들다시피 하는 대규모 보수공사를 한 거네요^^

그래서 보천욕일은 위대한 공훈을 세운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이순신 장군의 역할은 과연 보천욕일이라 할 만하지요.

 

 

 

비각 뒤쪽으로 충렬사 본당이 있고 좌우에 작은 비석이 하나씩 있습니다.

 

 

사당 중앙에는 이순신 장군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오른쪽 벽화는 장군과 관련있는 무기, 깃발 등일 테이고,

왼쪽 벽에는 전투 장면을 그려 놓았습니다.

 

 

충렬사의 왼쪽에 있는 비석은 '충무공비'입니다.

 

 

오른쪽 비석에는 '충민공비'라 쓰여 있습니다.

 

충민공이 누구지? 하면서 비석 아래 설명을 읽어 보니

1633년 처음 사당을 지을 때 남해현령이 세운 것이라 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받은 것은 1643년이군요. 

 

1658년 사당을 새로 지을 때 충무공비를 세우면서 이 충민공비는 땅에 묻었는데

(비석을 새로 세우면 기존의 것은 땅에 묻는 모양입니다.)

1973년 남해 충렬사가 사적으로 지정되고 정비사업을 할 때 발견되어 다시 세웠다 합니다.

 

사당 뒤편으로 봉분이 보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순국하신 뒤 3개월간 묻혔던 자리에 가묘를 만든 것입니다. 

한때 이 자리에 안치되어 있던 사실을 기념하는 의미이지요.

 

 

남해 충렬사는 사당 자체도 아담한 크기이고

전체적으로 면적도 좁고 작은 규모입니다.

 

그래도 이순신 장군을 모신 사당이라 그런지 느낌으로는 제법 크게 다가옵니다.

 

충렬사를 나와 바닷가를 따라 동쪽으로 가면 왕지벚꽃길이 이어집니다.

 

 

왕지벚꽃길은 꽃철에 제법 명성을 날리는 남해 설천 벚꽃길의 일부입니다.

 

 

설천 벚꽃길은 남해대교부터 설천면 문의리까지 5km 정도 이어집니다.

 

남해 왕지벚꽃길(설촌벚꽃길)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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