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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방방곡곡

수원화성의 100년 전 모습 (ft. 융건릉, 용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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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자료가 있어서 저장 폴더들을 뒤적거리다 수원화성의 100년 전 모습을 새삼 보게 되었습니다.

헤르만 산더가 1906년과 1907년 한국을 여행하며 찍은 사진이니까

정확히 셈하면 112년 혹은 113년 전 모습이네요.

 

헤르만 산더(1868~1945)는 독일 보병 중위로 주일본 독일대사관 무관으로 임명받아 1906년 2월부터 1907년 4월까지 근무했습니다.

이 기간 중 1906년에 사할린과 중국, 한국을 방문했다가 1907년에 한국을 다시 방문했습니다.

 

그때 찍은 사진들과 수집한 사진들이 제법 많이 남아 있어서 귀한 자료가 되고 있는데

수원화성의 모습도 몇 장 보입니다.

 

200년 넘게 그 자리를 지킨 화성이니 100년 전에도 당연히 있었을 텐데

그 모습을 사진으로 보니 괜히 신기합니다.

 

그러다가 문득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년)에 수원화성이 나왔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내용상 수원화성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고 

주인공들이 왔다갔다 하는 공간 중 일부로 나온 것인데

수원화성의 옛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신기했던 기억이 있네요.

 

그래서 이 영화 속 모습도 찾아 함께 올려 봅니다. 

 

헤르만 산더의 사진 속 장소는 수원, 원산, 길주, 제물포 이런 식의 도시 이름은 확인이 되는데

세세한 지명이나 정확한 명칭은 알 수 없습니다.

남의 나라 여행하며 그렇게까지 자세히 알고 적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헤르만 산더의 수원 사진 중 '동북쪽 모서리에 있는 정자'입니다.

 

 

딱 보는 순간 수원화성의 동북각루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각루는 성벽 모서리에 설치하는 치(치성)로, 높은 곳에서 사방을 둘러보기 위한 군사시설입니다.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누각을 지어 놓는데, 

수원화성의 동북각루는 휴식의 기능을 더하기 위해 연못을 함께 조성해 놓았습니다.

이름도 음풍농월용 정자인 양 방화수류정이라고 붙여 놓았는데

꽃을 찾고 버드나무를 따라 노닌다는 뜻입니다.

동북각루라는 명칭보다 이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지요.

정자들이 대개 네모 반듯한 생김인데 방화수류정은 여러 번 꺾어지는 생김이라 눈에 확 뜨입니다.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도 방화수류정이 나옵니다.

옥희가 그림을 그리는 사랑방 아저씨를 따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입니다.

 

 

동북각루와 함께 보이는 문은 북암문입니다. 

암문은 일반적인 성문과 달리 몰래 드나드는 문입니다.

적의 눈을 피해 군사들이 드나들고 식량과 물자를 운반하기 위해 만듭니다.

수원화성에는 암문이 5곳 있는데 모두 모양이 다릅니다.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 보이는 북암문입니다.

헤르만 산더의 사진에서는 북암문 아래쪽이 거의 땅에 묻혀 있는데

이 영화에서는 조금 흙을 파낸 모양 같습니다. 여전히 기단 부분은 묻혀 있고요.

 

 

북암문을 반대쪽에서 보면 이렇습니다.

 

 

 

화홍문 사진에는 '북수문'이라고 제대로 명칭을 적어 놓았습니다. 

수문 아래 빨래하는 아낙들이 보입니다.

 

 

수원화성에는 수원천이 흘러 갑니다.

화성뿐 아니라 우리나라 산성 중에는 안에 물이 흐르는 곳이 많고, 물길에 맞춰 문을 냈습니다.

물이 들어오는 쪽과 흘러나가는 쪽 2곳에요.

화성에는 남쪽과 북쪽에 수문이 있고 이 북수문은 화홍문이라고 합니다.

화홍문은 누각 아래로 일곱 개의 홍예문(무지개문)을 내서 교량처럼 만들었습니다.

화홍문은 평소에는 수문 역할을 하고 유사시에는 포대로 쓸 수 있습니다. 

 

 

100년 전 사진과 비교해 보면

소나무가 울창했던 서쪽 언덕은 지금 사라져 버리고 문 일부를 뚫어 도로를 냈습니다. 

 

영화에 등장한 화홍문입니다.

옥희가 꽃을 꺾어 어머니께 드리려고 신이 나서 달려가는 장면이네요.

 

 

옥희는 이 꽃을 사랑방 아저씨가 어머니 드리라고 주셨다며 장난을 치는데

어머니는 정말인 줄 알고 이 꽃을 너무나 소중히 다룹니다.

나중에 꽃이 시들자 책갈피에 고이 끼워 말리고요.

꽃을 꽂은 화병을 놓으며 그 자리에 있던 남편 사진을 치우는 장면은 맴찢...ㅠㅠ

 

화홍문이 보이는 또 다른 장면

옥희가 보이지 않자 가족들이 애타게 찾아다니는 모습입니다.  

옥희가 뛰어가던 곳은 화홍문 동쪽이고 이 장면은 반대쪽 모습 같네요.

 

 

그런데 사진을 보다 문득 궁금한 것이,

화홍문 옆에 있는 저 석수가 100년 전 사진에는 안 보인다는 겁니다. 

반대의 경우라면 그 사이에 누가 들고갔거나 파괴된 건가 할 텐데

100년 전 사진에는 없던 석수가 60년 영화 속에는 보이네요.

물론 이 석수는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그 사이에 새로 설치한 걸까요?

원래 있었는데 누가 집어갔다가 되돌아온 걸까요?

 

 

 

 

물이 흘러들어오는 북수문이 있으니 다시 나가는 '남수문'도 있습니다.

홍예문을 낸 것은 북수문과 같지만 문루는 없습니다. 

수문이라고는 해도 가물 때였는지 물이 없이 사람과 소가 걸어가고 있네요.

 

 

남수문은 1846년 6월에 홍수로 유실됐다가 1848년 복원되었습니다.

하지만 1922년 대홍수로 다시 유실되었고, 1927년 팔달문 일대 도심이 확대되면서 좌우 성벽과 함께 철거되었지요.

수원화성 중 한국전쟁 때 훼손된 곳들이 있어 1970년대에 복원 사업을 했는데 이때 남수문은 제외되었다가 2012년에야 복원되었습니다. 

 

 

수원관광 누리집에 있는 사진을 가져왔는데, 남수문 모습이 영 생경합니다.

갓 만들어서 반짝반짝한 모습이라 그런가?

세월이 지나면 좀 괜찮으려나?

 

복원이 제대로 된 건지, 얼마나 잘 된 건지는 모르겠는데

공사비가 162억이라는 말에는 뜨억!! 하게 되네요.

이거 복원하는데 그렇게나 많이???

알다가도 모를 게 관급공사네요.

 

수원화성 100년 전 사진을 보면서 대개는 어딘지 알겠던데

'남쪽 모서리에서 보는 시내 전경'이라는 이 사진은 영 헷갈립니다.

사진 설명에 남쪽 모서리라 해 놓았지만 원문에는 '남동쪽 모서리'로 되어 있습니다. 

 

 

오른쪽에 2층 문루가 보이는 걸 봐서는 북문인 장안문과 남문인 팔달문 2곳 중 하나일 테고

남쪽이라니까 팔달문인가 싶은데

왼쪽으로 성벽 모서리에 있는 저 누각이나 중간에 기둥이 여러 개 있는 건물을 보면

팔달문 가까이에 저런 건물 배치가 안 보입니다. 못 찾는 걸 수도 있고요. 

 

모퉁이의 누각은 암만 봐도 서북각루 같아 보이는데

2층 문루가 장안문이고 가운데 기둥 보이는 건물이 화서문이라고 생각하면 얼추 맞는 것 같다가도

그런데 성벽들 위치가 또 헷갈리고.....

 

한참을 들여다봐도 확신이 안 서네요, 흑흑.

 

 

제목이 '수원 관가'로 적혀 있는 이 사진은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입니다. 

 

 

깨끗하게 단장하긴 했지만 지금도 이 모습이고 

신풍루 앞의 두 나무도 그대로인 것 같아 반갑습니다.

 

 

다음으로, 수원화성 사진은 아니지만 정조 임금과 관련 있는 곳

'지위 높은 사람의 묘지'입니다.

 

 

딱 봐도 조선시대 왕릉입니다.

수원에 있는 왕릉은 2곳, 사도세자의 능인 융릉과 정조의 능인 건릉입니다.

사실 사도세자는 왕이 되지 못한 채 죽었기 때문에 무덤의 명칭이 '능'이 아닌 '원'이었습니다.

 

정조는 배봉산 기슭에 있던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곳으로 옮기고 왕릉 못지 않은 규모로 조성했지만

그래도 명칭은 현륭'원'이었습니다. 

현륭원이 융릉이 된 것은 고종 때인 1899년 장조로 추존되면서입니다.

현륭원에 합장되었던 혜경궁 홍씨는 헌경왕후로 추존되었습니다.

 

그럼 100년 전 사진 속 왕릉은 융릉? 건릉?

 

조선시대 왕릉들이 배치가 같아서 다 같아 보이는 게 함정인데

융릉과 건릉은 특히나 쌍둥이처럼 닮아서 영 헷갈립니다.

 

융릉과 건릉의 차이라면

융릉은 봉분이 홍살문과 정자각 지나 이어지는 축에서 조금 더 옆에 있다는 것과

융릉은 병풍석만 둘렀고 건릉은 난간석만 둘렀다는 것입니다.

 

병풍석은 봉분을 보호하기 위해 네모나고 넓적한 돌을 병풍처럼 둘러세운 것입니다.

난간석은 돌기둥을 난간 모양으로 둘러놓은 것입니다.

 

사진이 희미하지만 사진 속 능에는 병풍석이 둘러져 있는 것 같습니다.

정자각과 봉분의 각도를 봐도 그렇고 융릉으로 추측해 봅니다.

 

 

또 하나의 사진은 '남쪽 시외에 있는 절'

수원 남쪽에 있는 절이 한두 곳일까만은 용주사일 거라는 확신이 99.9% 듭니다^^

 

 

일단 앞쪽에 보이는 기둥 2개는 홍살문으로 보입니다.

불교 사찰에 홍살문을 세우는 것은 드문 일입니다.

용주사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장의 능을 옮기면서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절로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셨기 때문에 홍살문을 세운 것이라 합니다. 

그리고 홍살문 지나 보이는 삼문도 용주사임을 짐작케 합니다.

삼문 역시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구조물입니다. 

용주사가 현륭원(융릉)의 재궁으로 지어진 절이라 이런 구조가 되었을 겁니다.

 

어쩌다 발견한 사진 때문에 이리저리 비교하고 확인하다 보니 시간을 꽤 많이 소모했는데

그래도 이렇게 역사적인 장소의 옛 모습을 보며 현재와 비교해 보는 것도 제법 재미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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