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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실

나라에서 세운 140년전 외국어학교 "출세하려면 영어를 배우세요!" 대원군이 척화비까지 세워가며 쇄국을 고집했지만 조선은 운요호 사건에 이은 강화도조약으로 결국 나라의 문을 열었고, 미국이나 영국 같은 서양국가들과도 통상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이렇게 외국과 교섭할 일이 생기다보니 무엇보다 필요한 게 통역관이었고, 조선 조정에서는 이를 위해 1883년 외국어 학교인 동문학을 설립했습니다. 통변학고(通辯學校)라고도 합니다. 외교 고문으로 있던 묄렌도르프가 통상아문의 부속기관으로 설립했는데, 통상아문은 외교와 통상사무를 관장하던 관청으로 정식명칭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그러고 보니 지금의 외교통상부랑 역할이 같고, 뜻으로 보자면 명칭도 같습니다. 1884년에 우리나라를 여행했던 미국인 퍼시벌 로웰이 남긴 사진 중에 동문학 학생들과 교사 할리팩스의 사진이 있습니다. 할리팩스는 .. 더보기
정동, 정릉, 광통교 : 태종 이방원과 신덕왕후 강씨의 악연이 얽힌 곳 이문세의 노래가 생각나기도 하고 돌담길이 생각나기도 하는 곳, 정동.덕수궁 일대 주소는 서울시 중구 정동입니다. 정동은 법정동이고 행정은 소공동에 속한다는 군요.  정동이라는 이름은 정릉에서 유래한 겁니다. 네!북한산 자락에 있는 그 정릉(貞陵)입니다. 그 정릉이 처음에는 이곳에 있었습니다.정릉이 있던 자리가 현재 정동 4번지라고 해서 보니, 영국대사관 있는 곳이네요.   정릉은 태조 이성계의 둘째 부인이자 조선 건국 후 첫 왕비였던 신덕왕후 강씨의 능입니다. 고려시대에는 부인을 둘 두는 게 합법(?)이었을 겁니다. 조선시대 첩이랑은 다른 개념.이성계와 첫째 부인 한씨와의 사이에 있던 자식들이 방우부터 방연까지 6아들과 두 딸이었는데, 이 중 둘째 방과가 정종이고, 다섯째가 훗날 태종이 되는 이방원입니다.. 더보기
왕릉의 묘비에는 무엇을 적을까 여느 무덤의 비석과 마친가지로 왕릉에도 비석이 있습니다. 비석에는 무덤 주인의 본관과 이름, 생전에 벼슬을 했다면 그 벼슬명을 적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벼슬을 한 적이 없을 터이고, 그 경우에 남자는 학생學生, 여자는 유학儒學 등의 존칭을 붙입니다. 그러면 왕릉 비석에는 어떤 내용을 적어넣을까요? 왕릉의 묘비는 봉분을 만든 언덕의 아래쪽, 정자각 동쪽에 있습니다. 봉분 앞에 묘비를 세우는 보통의 무덤들과는 다릅니다. 정자각은 제수품을 차리고 절을 올리는 등 제례 의식을 거행하는 집입니다. 하늘에서 봤을 때 고무래 정丁자처럼 생겨서 정자각丁字閣이라고 합니다. 정자각은 봉분과 나란한 방향으로 앞쪽에 있지요. 이 정자각을 바라보고 우측에 있는 작은 집이 비각으로, 그 능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려 주.. 더보기
전라도와 제주도 사이를 왔다갔다 한 추자도 비행기가 뜨기 전 내륙에서 제주도에 가는 방법은 배를 타고 가는 것뿐이었습니다. 특히 동력선에 나오기 전에는 오로진 바람에 의지해 갈 수밖에 없었죠. 제주도 가는 뱃길은 전라도에서 연결되었고, 주로 배가 뜨던 곳은 강진과 해남입니다. 남해안을 떠나 제주도를 향해 망망대해를 가다보면 중간에 섬을 하난 만나는데, 바로 추자도입니다. 바람이 좋은 날은 추자도를 바라만 보며 지나갔고, 날이 궂으면 이곳에 피신했다 다시 떠나기도 했지요. 추자도는 여러 섬으로 되어 있어서 추자군도라고도 하는데 사람이 사는 섬이 4곳이고 무인도가 38개입니다. 유인도는 상추자도, 하추자도, 추포도, 횡간도입니다. ​ ​ 추자군도의 섬들 중 면적은 하추자도가 가장 크지만 행정, 교통, 상업 등의 중심지는 상추자도입니다. 지금은 상추자.. 더보기
왕자를 때리고도 목숨을 부지한 내시 (ft. 세종대왕) 다른 사람을 때리는 건 안됩니다! 도덕적으로도 그렇고 법적으로도 문제가 됩니다. 특히 장유유서 의식 때문인지 어쩐지 어린 사람이 연장자를 때리거나 직위가 낮은 사람이 상사를 때린다면 더욱 크게 비난 받습니다.(사실 폭력은 나이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나쁜 건데) 유교 사회였던 조선에서는 그 정도가 훨씬 심했을 겁니다. 특히 신분제 사회였으니 아랫사람이 상전을 때리는 행위는 일반 폭행 사건보다 더욱 큰 처벌을 받았습니다. 평민이 양반을 때렸다면 같은 평민을 때린 것보다 훨씬 엄하게 처벌받는 겁니다. 만일 노비가 상전을 때렸다면 목숨을 내놔야 하는 거고요. 그런데 그 상전이 왕자님이라면 어떨까요? 그야말로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듯한데, 왕자를 때려놓고도 관대한 임금님 덕분에 목숨을 건진 내시가 있었습니다... 더보기
사약, 죽을 죄인에게 임금님이 내리는 마지막 은혜 사약은 조선시대 사형방법 중 하나입니다. 마시면 죽는 약-..- 역사를 보면 사약을 받고 죽은 인물이 꽤 많이 등장합니다. 폐비 윤씨, 조광조, 송시열, 장희빈.....(그리고 또 누구였더라?^^;;;;;) 특히 연산군 생모인 폐비 윤씨나 장희빈처럼 사극에 단골로 등장하는 인물이 사약을 받았기 때문에 사극에서 꽤 익숙하게 보게 되지요. 이 사약을 한자로 死藥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死刑에 처하는 약이니 죽을 '死'를 쓸 것 같습니다. ​ 그런데 사약은 한자로 賜藥이라고 씁니다. 글자 그대로 풀면 하사받은 약이 되는데, 그 약을 하사하신 분은 바로 임금님입니다. ​먹고 죽으라고 보낸 약이지만 그래도 이 사​약이라는 게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신분이 높으신 분들에게만 베푸는 임금님의 은혜였.. 더보기
승정원일기는 누가 썼을까 우리나라 문화재 중 승정원일기(국보 303호)는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승정원일기는 조선시대 승정원에서 매일 처리한 업무 내용과 사건, 문서 등을 기록해 놓은 일기입니다. 즉 승정원의 업무일지인 셈입니다. 승정원일기는 조선이 건국된 이후 계속 작성되었지만 전기의 것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승정원일기는 인조가 임금이 된 1623년부터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물러나는 1910년까지 작성된 것입니다. ​288년 = 10만 5천여 일 동안 작성된 것으로 모두 3,243책입니다.​여기서 '책'이란 옛날 책들을 세는 단위로 지금 단위로 하면 '권'에 해당합니다.​옛날 책에서도 권이라는 단위를 썼지만, 지금의 권과는 달리 내용상 구별되는 단위였습니다. ​그래서 1책이 .. 더보기
객사에 모셔둔 전패는 왕을 상징하는 것 옛 관아 구조를 보면 꼭 있는 시설 중 하나가 객사입니다. 다른 말로 객관이라고도 하는데 객사客舍든 객관客館이든 글자 그대로만 보면 손님이 머무는 집입니다. 관아에 와서 머물 정도의 손님이라면 나랏일을 보러 온 관리입니다. 중앙에서 내려온 관리가 머물기도 하고, 관찰사(지금으로 치면 도지사)가 관할 구역을 돌아볼 때 머물기도 합니다. 그런데 객사는 숙소로서의 용도도 물론 있지만, 왕권을 상징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객사 입구에는 홍살문이 서있습니다. 홍살문은 문살을 붉게 칠한 것으로 신성한 장소를 보호한다는 의미를 가진 시설입니다. 문과 연결된 담장이 없는 걸 보면 출입을 위한 여타 문과는 다른 거지요.​순천 낙안읍성 객사 앞의 홍살문​순천 낙안읍성 객사​객사는 위치부터가 남다릅니다. 수령이 집무를 보.. 더보기
제주도의 옛이름 탐라는 무슨 뜻일까 제주도를 부르던 옛이름으로 탐라耽羅, 도이島夷, 영주瀛洲, 섭라涉羅, 탐모라耽牟羅, 탁라乇羅 등이 있습니다. 도이島夷는 섬나라 오랑캐라는 뜻인가요?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동이東夷라고 부른 거랑 같은 방식의 조어인가 봅니다.이 중에서 가장 낯익은 것은 탐라, 지금도 많이 쓰이는 이름입니다. 제주산임을 입증하는 의미에서 상표에도 많이 쓰이고 제주도 가게 중에 탐라라는 이름을 붙인 곳도 많고요. 그럼 이 탐라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요?​그 답은 제주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는데 지리지 탐라현 항목을 보면 이렇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에 번역본이 올라와 있는데 그것을 정리한 것입니다. ​전라도의 남쪽 바다 가운데 있다.에 나오는 기록은 이러하다.태초에는 사람이 없었는데, 세 신인(神人)이 땅으로부터 솟아.. 더보기
태종 가로되, 사관이 알지 못하게 하라 조선은 역사를 중시하는 유학의 나라답게 방대한 역사기록을 남겨 놓았는데 대표적인 것이 조선왕조실록입니다.실록은 역대 왕별로 편찬되어 있습니다. 실록은 왕이 돌아가시면 실록청을 설치하고 편찬하는데, 이때 가장 기초가 되는 기록은 사관이 평소 작성해 놓은 사초입니다. 여기에다 승정원일기 같은 국가 기록은 물론 필요하면 개인이 가진 기록도 참고를 합니다.  사극에 보면 어전회의 때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는 사람이 꼭 보이는데, 이 사람들이 바로 사관이지요. 사관과 함께 승정원 주서도 어전회의에 참석해 기록을 남깁니다. ​사관은 늘 왕을 따라다니며 왕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록합니다. ​아주 꼼꼼하게 말이지요. ​사관과 관련해서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번은 왕이 뜰을 산책하다 급하게 소피가.. 더보기
화려한 격구솜씨를 뽐냈던 태조 이성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무신이었습니다. 변방 지역 출신에다 무인이었던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이 문과에 급제하자 그렇게 기뻐했다고 합니다. 이성계의 무술 실력은 무척 뛰어났다고 하는데, 그것을 보여주는 일화로 격구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격구는 말을 탄 채 숟가락처럼 생긴 막대기로 공을 쳐서 상대방 문에 넣는 경기입니다. 비슷한 경기로 서양에 폴로가 있습니다. 격구를 으레 말을 타고 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걸어다니며 하는 보격구도 있습니다. 보격구는 넓은 마당에 구멍을 파놓은 다음 공을 쳐서 그 안에 넣는 방식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골프 같은 건가요? 고려 시대에 말을 타고 하던 격구가 조선 시대에 와서 걸어다니며 하는 격구로 변형된 거라 합니다. ​무예로서의 기능을 생각하면 마상격구가 .. 더보기
단종실록과 노산군일기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고종까지 임금별로 편찬되어 있는데, 각 임금이 서거한 뒤 만든 것입니다.왕이 서거하면 실록청이 설치되고, 사관이 기록해 놓은 사초와 승정원일기 등 그동안의 기록을 모두 모아 실록을 작성하게 됩니다.​편찬된 실록은 세종장헌대왕실록, 성종대왕실록 하는 식으로 해당 왕의 묘호를 붙여 부릅니다. 우리는 간단히 세종실록, 성종실록 이런 식으로 부르고 있지요.​그런데 태조실록부터 고종실록까지 조선시대 스물일곱 임금의 실록 중 두 실록에는 일기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연산군일기와 광해군일기가 그것인데, 반정으로 폐위되었기 때문에 -종이나 -조라는 묘호를 받지 못했고 기록도 실록이 아닌 일기로 남게 됩니다.​그런데 조선왕조실록 중 연산군일기와 광해군일기 외에 또 다른 일기가 있었습니다. 단종.. 더보기
서울에 남아있는 조선 5대궁궐 서울에는 조선시대의 궁궐 5곳이 남아 있습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이 그 다섯 곳입니다.조선의 법궁은 경복궁이었지만 왕이 꼭 경복궁에만 머문 것은 아닙니다.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겨 궁궐을 옮기기도 하고, 기분에 따라 다른 궁궐에 머물기도 했습니다. 이 다섯 궁궐을 한꺼번에 지었던 것은 아니고 처음에 경복궁을 지었다가 이후 창덕궁과 창경궁을 새로 지었지요. 경희궁과 덕수궁은 상황이 조금 다른데, 서울에 남은 조선시대 5대 궁궐을 간단히 알아보겠습니다. ​그 전에 먼저! 지금 남아 있는 궁궐들은 원래 모습에서 많이 훼손된 것입니다. 조선을 침탈한 일제는 당연히 조선의 정통성을 부인하려 들었고 이를 위해 벌인 일 중 하나가 궁궐 훼손입니다. 궁궐의 전각들을 이런저런 핑계로 허물거나 옮겨.. 더보기
고려의 마지막 충신인가 조선의 개국공신인가, 그 갈림길에서 고려가 기울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일었을 때 고려의 사대부들 중에는 끝까지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킨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데 적극 앞장선 사람도 있습니다. 이색, 정몽주, 이숭인 같은 사람은 어떻게든 고려를 유지하고자 했고 정도전, 조준 같은 사람은 새 나라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이들 중 특히 정몽주와 정도전이 대비됩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 주는 사이였고, 정도전에게 역성혁명의 가치를 심어 준 를 권해 준 것도 정몽주라는데, 서로의 길은 너무도 달랐습니다.같은 시기를 살았고 같은 공부를 했는데도 이들이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은 서로의 사회적 경제적 배경이 다르고, 또 정치적 신념이 달랐기 때문입니다.​먼저 사회적 배경을 보면 한쪽은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반.. 더보기
전주 남문 풍남문 이름은 풍패지관에서 비롯된 것 언젠가부터 한옥 마을이 핫한 장소로 떠오르더니 이제는 전주라고 하면 한옥 마을이 대표적인 장소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전주 한옥 마을 바로 옆에 역사적인 건축물이 우뚝 서있는 건 아시나요?바로 전주읍성의 남문이었던 풍남문입니다.남문시장 청년몰이 꽤 성공적인 사례로 언급되며 다른 곳에서 많이 벤치마킹 하는 것 같은데, 시장 이름에 있는 남문이 바로 이 풍남문입니다. 서울로 치면 남대문시장 같은 경우네요^^​서울 도성의 남대문을 비롯해 대부분의 읍성이 그렇듯 풍남문 역시 성벽은 없이 문만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가끔 이런 유적지들을 보면 담벼락 없는 성문이 과연 무슨 의미일까....그런 생각이 들곤 합니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ㅠㅠ 그런 느낌.​어쨌든 전주부가 있던 읍성의 남문 풍남문은 늠름하게 서..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