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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방방곡곡

진주성 꼼꼼하게 살펴보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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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 꼼꼼하게 살펴보기 1편에서 이어집니다)

◀◀ '진주성 꼼꼼하게 살펴보기 1' 보러 가기

 

촉석문을 들어서면서 왼쪽으로는 촉석루가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폭이 넓은 계단이 보입니다.

계단을 오르면 너른 공간 저쪽에 아름드리 나무들이 성벽을 따라 나란히 서있고 오른쪽으로 호국의 종이 보입니다.

정면으로 비각 두 개가 나란히 서있는데 마주봤을 때 왼쪽이 김시민 장군 전공비이고 오른쪽이 촉석정충단비입니다. 

 

 

김시민장군전공비는 '고목사김후시민전성각적비'라고도 부릅니다. 

김시민 장군은 임진년 진주대첩(진주성 1차 전투)을 승리로 이끈 주인공입니다. 그 공로를 새긴 비석이지요. 전쟁이 끝난 후 김시민 장군은 2등 공신으로 인정되어 선무공신교서를 받았습니다. 이 교서는 국립진주박물관에 있다 합니다. 진주박물관은 진주성 안에 있습니다. 

 

김시민장군전공비

 

촉석정충단비는 계사년(1593년)에 있었던 진주성 2차 전투에서 순국한 이들을 기리는 비석으로 숙종 12년(1686) 세운 것입니다. 부친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전사한 고종후, 진주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몸을 던진 김천일과 최경회를 비롯해 당시 순국한 인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촉석정충단비

 

두 비석 옆으로 넓고 높게 설치된 단이 있습니다. 계단을 오르면 제단이 있는데, 임진대첩계사순의단입니다. 

계사년(1593)에 있었던 진주성 2차 전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넋을 기리는 제단입니다. 

 

진주성 임진대첩 계사순의단

 

계사순의단에서 서쪽 너머로는 제법 너른 터가 비어 있습니다. 원래는 진주성의 부속 건물들로 차있어야 할 공간이지만 임진왜란이다 한국전쟁이다 해서 죄 불타 버린 거지요ㅠㅠ

 

이곳에 유등축제 때 설치했던 조형물들이 남아 있던데, 그 가운데 우물터가 있습니다. 

우물터에서 아낙네들이 물을 긷고 있네요^^ 유등 축제 때 설치한 건데 공간 맞춤형이군요.

 

 

진주성 안에는 3개의 우물이 있었다는데 그 중 하나를 복원해 놓은 것입니다. 우물의 깊이는 8.3미터, 지름 1.5미터입니다. 

 

공터 너머로 김시민 장군 동상이 우뚝 서있습니다. 군사들에게 물러서지 말고 싸우라며 호령하는 듯한 모습입니다. 

아니, 왜군들한테 까불지 말라고 경고하는 모습 같기도....

김시민 장군은 적의 5분의 1도 안 되는 인원을 이끌고 맹렬히 싸워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이마에 총탄을 맞고 순국했습니다. 

 

 

동상 밑에 보이듯이 김시민 장군의 시호는 충무공입니다. 이 분의 업적에 어울리는 시호인데 우리에게 충무공은 이순신 장군이 워낙 유명해서 말이지요^.^

 

진주성의 북문인 공북문도 보입니다. 연식이 별로 안 되어 보이는데 2002년 복원한 것이군요.

공북이란 북쪽을 향해 공손하게 예를 올린다는 뜻이라네요. 진주에서 북쪽은 임금님이 계신 한양입니다. 신하가 임금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겁니다. 

 

 

공북문 바깥쪽으로 나가 보니 주차장이 있습니다. 공북문은 1층의 석축도 그렇고 2층의 문루도 그렇고 무척 웅장합니다.

 

 

김시민 장군 동상이 있는 곳에서 살짝 비탈긴 길을 따라 서쪽으로 오르면 2층 누각이 보입니다. 

영남포정사라는 현판을 걸고 있는 이 문루는 진주성 안에 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영남포정사 문루

 

광해군 10년(1618) 병마절도사 남이흥이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의 정문으로 처음 지었고, 고종 33년(1896) 전국을 13도로 개편할 때 경상남도 감영(지금의 도청)이 진주에 설치되면서 영남포정사의 정문이 되었습니다.

포정사는 감영과 같은 말로, 조선시대 관찰사(지금의 도지사)가 업무를 보는 관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영남포정사란 경상도 지역 도청이란 말이고, 이 문루는 지금으로 치면 도청 정문인 겁니다.
경상남도 도청은 1925년 부산으로 옮겼다가 지금은 창원에 있습니다. 

 

 


영남포정사 문루는 달리 망미루望美樓라고도 합니다. 뒤쪽에서 보면 서영보(1759~1816)가 썼다는 망미루 현판이 보입니다. 

 

망미루

영남포정사 문루 앞에는 하마비가 서있습니다. 수령이하개하마비, 수령 아래로는 다 말에서 내리라는 겁니다. 지금의 도로표지판인 건가요?^^

그 고을 수령보다 높은 사람이 찾아오면 모를까, 관아에 말을 타고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수령뿐입니다. 

 

 

영남포정사 문루(망미루)에서 오른쪽을 보니 비석들이 즐비합니다. 여느 고을에서나 볼 수 있는 선정비들 그런 건가 봅니다. 안내문을 보니 진주성과 시내 여기저기 있던 비들을 모아 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선조 37년(1604) 합포(마산)에 있던 경상우도 병영을 진주성으로 옮긴 이수일 목사 유예비를 비롯해 조선시대 비석 30여기가 있습니다. 

 

 

비석군을 지나 보이는 경절사는 고려 시대 인물인 하공진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곳입니다. 역사 지식이 짧아 처음 이름을 들었는데 거란이 침입했을 때 공을 세운 분이라고 합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하공진 장군을 알리는 리플렛과 방명록을  비치해 놓았고, 진주 하씨 종친회 사무실도 있습니다. 하공진 장군이 진주 하씨 시조라는군요. 사무실 안에 어른들 몇 분이 보이네요. 

경내가 잘 정비되어 있는데 진주성에서도 관리를 하겠지만 문중에서 신경을 많이 쓴다는 게 느껴집니다. 

 

경절사 앞에 웬 비석이 서있습니다. 안내문이 없어 내막은 알 수 없지만 고려 어쩌고 하는 글자로 보아 경절사에 모신 하공진 장군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경절사 옆에 있는 빈 터는 운주헌이 있던 자리입니다. 운주헌은 조선시대 통제사와 병사(병마절도사)의 집무실을 일컫는 말이라고 하네요. 관찰사의 집무실은 선화당, 통제사의 집무실은 운주헌.

어쩐지 제주 운주당도 그렇고 통제영 운주당도 그렇고 '운주'라는 말이 많이 쓰인다 했더니...^^ 운주는 군막 속에서 전략을 세운다는 뜻이군요.

 

진주성 운주헌터

 

진주성 운주헌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집무실입니다. 경상우도 병영은 원래 합포(마산)에 있었는데 임진왜란 이후 진주성으로 옮겨왔습니다. 그러면서 무관인 병마절도사가 진주목사를 겸임하게 했는데, 재밌는 건 "군인이 와서 고을을 다스리게 되니 인재가 나오지 않고 풍습이 잘 교화되지 못한다"는 불만이 나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병사와 목사 겸임 제도를 폐지했다네요. 그런 주장을 했던 분들의 후예들이 1961년 이후 군사정권 아래에서 어떤 생각을 하셨을지 자못 궁금....

 

운주헌은 고종 33년(1896) 진주에 경상남도 감영이 설치된 후 관찰사 집무실인 선화당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운주헌터 북쪽으로 성벽 쪽에 북장대가 있습니다. 진주성의 북쪽 지휘소입니다. 위치가 제법 높아 성밖은 물론이고 성안 곳곳도 잘 볼 수 있겠습니다.

 

진주성 북장대

 

진주성 북장대는 달리 진남루라고 합니다. 안쪽에 진남루 현판이 걸려 있네요.

진남루는 보통 남문에 있는 문루에 붙이는 이름 아닌가요? 강진에 있는 전라병영성 남문도 그렇고 공주에 있는 공산성 남문도 그렇고요. 남쪽이 훤히 잘 보여서 그런 건가?  

 

 

진주성 북장대에서 성밖을 내려다보니 이마트가 보이는군요^^

 

 

북장대 옆에는 청계서원이 있습니다. 들어가 보려 했지만 문이 잠겨 있네요.

답사를 다니다보면 향교든 서원이든 문이 꽁꽁 잠겨 있는 곳이 대다수입니다. 그래도 이곳은 진주성 안에 있어서 개방해 놓은 줄 알았는데, 아쉽네요. 

 

뒤쪽 성벽에서 본 청계서원

 

청계서원은 고려 문신인 정신열과 정천익을 배향한 서원입니다. 

정신열은 거란의 침입 때 공을 세운 분이고 정천익은 문익점의 장인으로 문익점이 중국에서 몰래 들여온 목화씨를 키워내는 데 성공한 분입니다. 우리나라 어린이들은 이 땅의 백성들이 따뜻한 솜옷을 입게 해준 분이라며 문익점 이야기를 듣고 자라는데 정천익의 후손들은 그 씨앗을 키워낸 공로가 묻히는 게 억울했나 봅니다. 이 땅에 목화를 퍼뜨린 주인공이 누구인가를 두고 두 집안이 서로 자신들의 조상에게 공이 있다고 다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지금은 정천익이 좀 많이 알려졌으려나요? 

 

진주성 안에는 국립진주박물관이 있습니다. 진주박물관은 임진왜란 특성화 박물관입니다. 임진왜란 당시의 처절한 역사가 서린 현장에 자리한 박물관답네요.

여담으로, 전국의 국립박물관은 무료 입장인데 여기 진주박물관은 진주성에 들어오는 입장료를 내야 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국립진주박물관을 보면서 자꾸 일본스럽다는 느낌이 듭니다. 건물 옆에 쌓아 놓은 석축은 왜성 같다는 생각이 들고, 기와 지붕도 뭔가 일본 느낌을 줍니다. 지붕이 직선적이라 그런가?

지붕 꼭대기를 보면 옛 일본 사람 초상화에서 본 관모도 연상되고.....아무튼 이상한 느낌에 자꾸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물론 순전히 느낌입니다. 제 눈이 삐툴어진 걸까요?ㅠㅠ

 

 

진주박물관을 지나 경사진 길 위에는 포루가 보입니다. 화포를 설치해 놓은 진지입니다. 

선조 40년(1607) 병마절도사 김태허가 진주성에 포루 12좌를 설치했었는데 그 중 한 곳을 복원해 놓은 것입니다. 

 

 

포루 안에 화포 3기가 있습니다. 물론 전시용^^

가장 큰 것이 천자총통, 그 다음 지자총통, 셋 중 가장 작은 것이 현자총통입니다. 더 작은 것이 있었다면 황자총통이라 했을 겁니다. 

지금 우리가 일련번호 매길 때 가, 나, 다, 라 혹은 A, B, C, D 하는 것처럼 옛날에는 천자문의 글자를 사용했습니다.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르 황......

 

 

총통의 구조와 성능을 설명해 놓았군요. 

 

 

남쪽으로 길을 계속 가면 창렬사가 나옵니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가파른 계단을 올라 정문을 지나면 다시 계단 위로 문이 보이고, 이 문을 지나면 사당 건물들이 서있습니다. 창렬사 현판을 단 정사(正祠)를 중심으로 양옆으로 동사(東祠)와 서사(西祠)가 함께 있습니다.

창렬사는 계사년 전투에서 순절한 분들의 신위를 모시기 위해 선조 40년(1607) 건립한 사당입니다. 김시민 장군의 신위를 맨 윗자리에 모시고 김천일, 황진, 최경회 등 39분의 신위를 모셨습니다. 

 

 

진주성 창렬사

 

창렬사 동사(東祠)에 모셔진 위패들

 

창렬사 옆에 호국사가 있습니다. 

안내도에서 호국사라는 이름을 봤을 때는 '사'자가 당연히 사당을 뜻하는 祠 이 글자려니 했습니다. 의기사, 경절사, 창렬사처럼요. 그런데 호국사는 절이었네요. 보통 ○○사라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글자가 절 사寺자인데 내리 祠자 붙은 건물만 보다가 막상  절 사寺자를 보니 당황스럽습니다^^ 더구나 조선시대 읍성 안에 절이라니...

 

 

호국사는 고려 말기에 승병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절이라고 합니다. 고려 말은 왜구가 극성을 부리던 때입니다. 이를 막기 위해 진주성을 고쳐 쌓으면서 승병 양성소도 건립한 모양입니다. 처음에는 내성사內城寺라는 이름이었는데 숙종이 임진왜란 때 순국한 승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호국사라는 이름을 내렸습니다. 

진주성을 정비하면서 발견된 일주문 자리에 문을 새로 세웠고 다른 건물들도 지었다는군요. 지금도 공사중인 모습입니다. 호국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입니다. 

 

호국사 앞에서 비탈길을 오르면 서장대입니다. 장군이 군사들을 지휘하던 서쪽 장대. 

<여지도서>에 의하면 본래 건물은 규모는 작지만 촉석루와 같은 누각이었고 이름을 회룡루라 했습니다. 지금은 단층건물인데 1943년 서상필이라는 분이 중건한 것입니다. 

 

진주성 서장대

 

서장대에서 성벽 너머를 바라보니 남강을 가로지른 천수교가 보입니다. 

천수교 아래쪽의 너른 터는 뭔가요? 지도에는 음악분수대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저 공룡들은 뭐지?

 

 

서장대를 내려서며 진주성 한 바퀴를 마칩니다. 

 

처음 진주성에 왔을 때는 촉석루를 봤던 것 같고, 그 언젠가는 진주박물관을 보고 갔었는데 이번에 꼼꼼하게 살펴보니 꽤 많은 기억 공간들이 있군요. 그리고 오래된 나무들이 즐비한 것이 인상적으로 남습니다. 

 

진주성을 찾을 때 물론 역사를 되새기는 현장으로 공부하며 둘러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도시 속의 공원처럼 생각하며 가볍게 걸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진주성 보러 가는 길, 입장료, 주차비에 대해 보려면 여기를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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