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리나라 방방곡곡

진주성 꼼꼼하게 살펴보기 1

반응형

날맑은 가을날, 당일치기 가을 여행 겸 역사 답사 겸 가기에 어디가 좋을까 궁리하다 진주성으로 향했습니다.  

 

진주성은 삼국시대에 토성으로 처음 조성되었고 고려 말에 석성으로 고쳐 쌓았습니다.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대부분 허물어지고 사라졌다가 197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복원되기 시작했습니다. 

 

진주성은 임진왜란의 3대첩 중 하나가 벌어졌던 곳입니다. 다른 두 곳은 한산대첩과 행주대첩. 

진주대첩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그 해에 있었던 진주성 1차 전투를 말합니다. 김시민 장군이 이끄는 3,800여 명이 2만에 이르는 왜군과 맞서 처절하게 싸운 끝에 성을 지켜냈습니다.

하지만 이듬해(계사년, 1593) 진주성 2차 전투에 패하며 7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희생되었지요. 

 

그런데 임진왜란과 관련해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은 진주성보다는 촉석루입니다. 

진주성이 함락된 뒤 논개가 촉석루 의암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에 몸을 던진 일이 워낙 유명해 진주성보다는 성의 일부인 촉석루가 훨씬 더 유명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아마 진주 하면 촉석루부터 떠올릴 겁니다. 

나 역시 어릴 때부터 진주 촉석루만 알고 있다가 사실은 그 촉석루가 진주읍성의 한 누각이라는 사실을 한참 뒤에 알았습니다. 진주성을 달리 촉석성이라고도 부른다 합니다. 

 

촉석루 명성에 가려져서 그렇지 진주성 안에는 임진왜란과 관련된 순국 유적이 꽤 많습니다. 이번에는 그곳들을 꼼꼼히 살펴보았습니다. 

 

진주성 촉석문

 

진주성 답사는 촉석문에서 시작됩니다. 지금 있는 촉석문은 1972년 복원된 것입니다. 진주성에 올 때는 늘 이 이문으로만 들어가서 당연히 진주성의 정문이려니 했고 제게 성의 정문은 남문이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정면은 남쪽! 그런데 진주성은 남쪽이 강에 접해 있으니 동문인 촉석문이 정문입니다. 

자가용으로 오면 북문과 서문 쪽에 주차장이 있는데 그 쪽으로 들어오면 왠지 옆구리 내지 뒤통수 쪽에서 들어오는 느낌일 것 같아요^^

 

진주성 보러 가는 길, 입장료, 주차요금에 대해 보려면 여기를 클릭!

 

 

 

촉석문을 들어서니 장수와 군졸이 반겨 줍니다. 성문에 흔히 세워놓은 조형물인가? 했는데 재질이 색다릅니다.

알고 보니 진주 유등축제를 한 지 얼마 안됐는데 그때 전시했던 것이랍니다.   

 

촉석문을 들어서면 촉석루가 정면에 보이고 그보다 앞쪽 너른 터에 비석이 하나 서있습니다. 

 

진주성 촉석루중삼장사기실비

 

비석에 쓰인 글자는 矗石樓中三壯士記實碑 촉석루중삼장사기실비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판서에 추증된 김성일, 조종도, 이조판서에 추증된 이로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세운 비라는군요.

김성일(1538~1593)은 임진왜란 전에 일본에 갔다와서 일본이 침입하지 않을 거라고 주장했던 학봉 김성일 바로 그 분입니다. 그래서 전쟁이 터진 초기에 파직되었지요. 허물을 씻고 공을 세울 기회를 주자는 류성룡의 간청에 따라 다시 경상도초유사에 임명되어 활동하다가 병사했습니다.  

조종도(1537~1597)는 김성일과 함께 의병 모집에 힘썼고 정유재란 때 안의의 황석산성에서 의병들과 함께 가토 기요마사 부대와 맞서 싸우다 전사했습니다. 

이로(1544~1598) 역시 왜란이 터지자 조종도와 함께 귀향하여 의병 활동을 했습니다.

 

이제 촉석루를 보러 갑니다. 촉석루 주변에 담장이 둘러져 있고 장수를 뜻하는 帥(수)자가 새겨진 당이 걸려 있습니다. 이 당이 걸려 있는 것은 장수가 지휘한다는 것, 촉석루가 군사 시설임을 보여 줍니다. 

 

 

촉석루는 평양 부벽루, 영남 밀양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꼽힙니다. 

고려 고종 28년(1241) 진주목사 김지대가 처음 지었는데 몇 차례 불에 타 없어지고 고쳐 짓기를 반복했습니다. 한국전쟁 때 불타 버린 것을 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1960년 다시 지었습니다.  

 

 

진주 촉석루

 

촉석루는 누구나 올라갈 수 있게 개방되어 있습니다. 유적지 가서 문 꽁꽁 닫아놓는 곳을 주로 보다가 이런 곳에 오면 참 좋습니다. 굳이 역사의 현장 어쩌고를 떠나 가볍게 산책으로 오더라도 여유롭게 즐길 수 있고 말이지요. 

 

촉석루 안쪽에 남장대라고 쓰인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누각에 서서 바라보면 남강과 진주 시내가 널리 눈에 들어 옵니다. 장대는 장수의 지휘소입니다. 그러니 사방을 잘 살필 수 있게 시야가 트여 있습니다.

비상시에야 군사 시설이지만 평소에는풍류를 즐기는 곳으로 이용됩니다. 과거 시험장으로도 이용됐다고 합니다. 

 

 

촉석루 안에 영남제일형성이라 쓰인 현판이 보입니다. 영남제일은 알겠는데...형성은 모습을 새겼다 그런 건가요? 영남에서 제일 가는 모습을 새겼다 그런 뜻 아닐까 짐작만 합니다. 

 

 

촉석루 바로 옆에는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 의기사가 있습니다. 의기는 의로운 기생 즉 논개를 말합니다. 

 

의기사가 처음 건립된 것은 영조 16년(1760) 입니다.

논개의 죽음을 진주 사람들은 널리 알리고 인정받고 싶었을 겁니다. 우리 지역에 이렇게 의로운 여인이 있었다고요. 논개 이야기는 <어우야담>에서 처음 문자로 기록됩니다. 어우야담은 유몽인(1559~1623)이 민간의 이야기들을 모아서 엮은 책입니다. 

 

경종 원년(1721) 경상우병사로 부임한 최진한은 진주 사람들의 요구와 <어우야담>을 근거로 들어 조정에 논개에 대한 포상을 건의했습니다. 하지만 이때는 받아들여지지 않은 듯, 영조 16년(1740) 경상우병사 남덕하의 건의로 의기사가 건립되었습니다.  
의기사는 한국전쟁 때 촉석루와 함께 불탔다가 1956년 의기창렬회에서 시민의 성금을 모아 다시 세웠습니다. 

 

의기사 앞에는 의기창렬회에서 세운 의랑논개의비가 서있습니다. 한문으로 기록된 숱한 비석들 속에 한글로 쓰여 있군요. 

 

의랑논개의비

 

관심있게 의기사 안내문을 읽고 있던 아이들. 

 


사당으로 들어서는 문이름이 指水門지수문입니다. 여기에서 물은 논개가 몸을 던진 그 물이겠지요?

 

의기사 지수문

 

논개 영정이 예전과 바뀌었습니다. 전에 걸었던 영정은 김은호 화백이 그렸는데 복식과 머리모양 같은 게 고증과 달라 말이 많았습니다. 더구나 김은호 화백은 친일 행적으로 논란이 되는 사람이라.......

 

논개 영정

 

사당 처마 밑에 현판이 두 개 보이는데 오른쪽 것은 다산 정약용이 쓴 '의기사기'입니다.

정조 3년(1799) 경상우병사 홍화보가 의기사의 낡은 곳을 수리하고 새로 단청을 하였고 사위인 정약용에게 의기사기를 짓도록 했다는군요.

정약용이 진주에 부임한 장인을 찾아갔다가 논개 사당에 글을 지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바로 그 글입니다. 

 

진주성 촉석루 의기사기

 

의기사기는 다산시문집 13권에 실려 있습니다. 마침 한국고전종합DB 누리집에 한글본이 있어 옮겨 봅니다.

 

부녀자들의 성품은 죽음을 가볍게 여긴다. 그러나 하품인 사람은 분독(忿毒)을 이기지 못하여 울적하여 죽고 상품인 사람은 의로워서 그 몸이 더럽혀지고 욕을 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여 죽는다. 그가 죽었을 때 모두들 절개가 바르다고 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자기 혼자 죽는 데 그친다. 창기와 같은 부류는 말할 나위도 없다.

어려서부터 풍류스럽고 음탕한 일과 정을 옮기고 바꾸는 일에 길들여졌으므로, 그들의 성품은 흘러다니고 한군데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들의 마음 또한 남자들은 모두 남편이라고 생각한다. 부부의 예에서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군신의 의리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예로부터 전쟁터에서 멋대로 미녀를 약탈한 경우가 이루 헤아릴 수 없지만 죽어서 절개를 세웠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옛날에 왜구가 진주를 함락하였을 때 의로운 기생이 있었으니, 그녀는 왜장을 꾀어 강 가운데 있는 돌 위에서 마주 춤을 추다가 춤이 한창 무르익어 갈 즈음에 그를 껴안고 못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이곳이 그녀의 의절을 기리는 사(祠)이다. 아, 어찌 열렬한 현부인이 아니랴. 지금 생각해 볼 때, 왜장 한 명을 죽인 것이 삼장사(三壯士)의 치욕을 씻기에는 부족하다고 하겠으나, 성이 함락되려고 할 때 이웃 고을에서는 병사를 풀어서 구원해 주지 아니하고, 조정에서는 공을 시기하여서 패하기만 고대하였다. 그리하여 견고한 성지(城池)를 적군의 손아귀에 떨어뜨려 충신과 지사의 분노와 한탄이 이 일보다 심한 적이 없었는데, 보잘것없는 한 여자가 적장을 죽여 보국을 하였으니 군신간의 의리가 환히 하늘과 땅 사이에 빛나서, 한 성에서의 패배가 문제되지 아니했다. 이 어찌 통쾌한 일이 아닌가.

사(祠)가 오래도록 수리를 하지 못하여 비바람이 새었는데, 지금의 절도사 홍공이 부서진 것을 고치고 새롭게 단청을 칠한 다음 나에게 그 일을 기록하게 하고, 자신은 절구 한 수를 지어 촉석루 위에 걸었다.

 

 

 

촉석루 뒤쪽 성벽을 보면 의암으로 내려가는 길이 보입니다. 

 

 

제법 가파른 계단에 바로 강물이 나타나네요. 자칫 위험할 수 있겠습니다.

 

 

의암이 보입니다. 바위 옆면에 그림 같은 서체로 義巖 두 자를 새겨 놓았습니다. 

선조 26년(1593) 음력 6월 29일 2차 전투에서 진주성은 결국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논개는 승리에 한껏 취해 있던 왜장을 이 바위로 유인한 뒤 끌어안고 뛰어내렸습니다. 사람들은 이 바위를 의로운 바위라고 해서 의암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바위의 글자는 인조 7년(1629) 정대륭이 새긴 것이라 합니다. 

 

 

의암 위쪽에 의기논개지문이라 쓰인 비각이 보입니다. 옆에 있는 안내문을 보니 논개의 사적을 기록한 의암사적비라 적혀 있습니다. 

진주 사람들이 논개의 뜻을 기리는 사적비를 세웠고, 경상우병사 남덕하가 비각을 세우고 의기논개지문이라는 현판을 걸었습니다.

 

정식(1683~1746)이 지은 비문에는 이런 시가 있다고 합니다. 

"그 바위 홀로 서있고 그 여인 우뚝 서있네

이 바위 아닌들 그 여인 어찌 죽을 곳을 찾았겠으며

이 여인 아닌들 그 바위 어찌 의롭다는 소리 들었으리요

남강의 높은 바위 꽃다운 그 이름 만고에 전하리"

 

 

의암에서 올려다 보니 바위 벼랑 위로 촉석루가 보입니다. 하륜이 지은 촉석루기에 의하면 강 가운데 돌이 우뚝 솟은 바위 위에 지은 누각이라 촉석矗石이라 이름 붙였다 하더니 과연 그 말대로입니다. 

 

 

촉석루 서쪽에는 쌍충사적비가 있습니다. 이 사적비는 제씨쌍충비라고도 합니다.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운 성주목사 제말 장군과 이순신 장군을 도와 공을 세운 제홍록 장군을 기리는 사적비입니다. 제홍록 장군은 제말 장군의 조카라는군요. 

제말 장군은 의병을 모아 웅천, 김해, 의령 등지에서 싸웠고 제홍록 장군은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싸우다 정유재란 때 전사했습니다. 

정조가 두 분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쌍충각을 지어 진주성과 성주성에 각각 세우게 했는데, 진주성의 이 쌍충비는 일제 강점기에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가 1961년 지금 위치로 가져오면서 비각을 새로 지었다 합니다. 

 

진주성 쌍충각

 

쌍충각 들어서는 문 옆으로 작은 문이 하나 보이는데 강변 산책로라고 적혀 있습니다. 

 

 

남쪽 성벽 아래 남강변을 따라 걸을 수 있는 250미터 정도의 산책로입니다. "의암과 촉석루 처마, 그리고 진주교를 배경으로 촬영하기 좋은 곳"이라는 안내문이 아니더라도 진주성 아래를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이 반가워 내려가 보았습니다. 

산책로에서 올려다보니 진주성이 벼랑 위에 서있음이 새삼 실감납니다. 촉석루와 진주교도 보입니다. 

음, 그런데, 경치는 좋았으나 물 냄새가 심히 괴롭군요ㅠㅠ

 

 

(꼼꼼하게 살피다 보니 포스팅이 심히 길어지는군요. 2편으로 이어집니다.)

'진주성 꼼꼼하게 살펴보기 2'를 마저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