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이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말이 비운의 소년왕이라는 것입니다.
단종(1441~1457)은 즉위 3년 만인 1455년 6월 삼촌인 수양대군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고 결국 유배지인 영월에서 죽음을 맞게 됩니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를 떠날 때 누구보다 억장이 무너졌을 사람은 정순왕후일 겁니다.
정순왕후는 1440년 전라도 정읍에서 태어나 단종 원년인 1453년 왕비로 간택되어 이듬해 책봉받았습니다.
하지만 3년 만에 단종은 왕위에서 끌려내려와 노산군으로 강봉되었고 정순왕후 역시 왕비에서 하루아침에 군부인이 되었습니다.
단종이니 정순이니 하는 시호는 먼 훗날 숙종 때에 가서야 복위된 후 받은 것입니다.
조선 왕비 중 정순이라는 시호를 받은 분은 또 있습니다.
66세 영조에게 15세 어린 나이에 시집을 왔던 정순왕후가 그분입니다.
물론 현대의 우리가 한자를 읽었을 때 발음이 같은 것이지 뜻글자인 한자로는 서로 다릅니다.
단종비는 정순定順왕후 송씨이고
영조비는 정순貞純왕후 김씨입니다.
영조비인 정순왕후는 조선 후기 세도정치로 권세를 누렸던 그 집안 사람입니다.
어린 나이에 남편을 멀리 보내고 죄인 아닌 죄인으로 살아야 했던 정순왕후의 흔적을 찾아
이번 가을 서울 숭인동과 창신동 일대를 답사해 보았습니다.
먼저, 숭인동의 동망봉은 정순왕후가 남편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랬다는 곳입니다.
아무리 억울한들 서슬 퍼런 세조에게 한 마디 항변조차 할 수 없었을 터이고, 그저 남편 있는 쪽만 하염없이 바라보았겠지요.
동망봉은 요즘 벼룩시장으로 유명한 동묘에서 큰길 맞은편으로 보이는 산이고 낙산과 이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서울 어느 곳이나 그렇듯 집들이 가득 차고 길이 여기저기 나있어서 산이라는 것을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저 가파른 동네로구나 하는 느낌이네요.
동망봉에 오르면 동망정이라는 정자가 세워져 있습니다.
동묘앞역 옆에 있는 고층 아파트가 동망봉에서 비슷한 높이로 보이네요.
그냥 평범한 동네 정자이지만 정순왕후 이야기를 배경으로 삼으니 왠지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동망봉에는 원래 영조가 친필을 써서 내린 동망봉 세 글자를 새긴 바위가 있었다는데 일제강점기 때 채석장으로 쓰이면서 산이 깎여 나가는 바람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동망봉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지금은 온통 아파트뿐이네요.
동망봉 정상은 근린공원으로 조성되어 체육시설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아침부터 배드민턴을 치는 동호회분들이 보이네요.
배드민턴장을 지나서 가면 숭인재가 나옵니다.
2018년 11월 준공된 숭인재는 근린공원을 이용하는 주민들을 위한 쉼터로, 정순왕후를 기억하는 공간도 함께 마련해 놓았습니다.
바닥에 정순왕후 삶의 흔적들이라 하여 관련된 장소를 새겨 놓은 지도가 있습니다.
숭인재 앞에 있는 안내판에는 동망봉, 청룡사와 정업원, 자주동샘, 영도교 등 정순왕후와 관련된 장소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단종과 헤어진 뒤 정순왕후는 정업원(현재 청룡사)에서 지내며 매일같이 동망봉에 올라 남편을 향한 그리움을 달랬습니다. 나라에서 주는 집과 식량을 거부한 채 절에서 살며 염색일 등으로 생계를 이어갔고, 정순왕후가 어렵게 살아가자 마을 여인들이 중심이 되어 도움을 주었다 합니다.
건물 옆쪽에는 정순왕후와 관련된 내용들을 소개하는 공간이 있습니다.
정순왕후 일대기가 있는데 역사적 사실들과 함께 적혀 있어 이해하기가 좋습니다.
정순왕후가 등장하는 문학 작품, 영화와 드라마, 연극 등을 소개해 놓았습니다.
이광수의 <단종애사>와 장덕조의 <광풍>은 정순왕후보다는 단종에 관한 이야기이고, 김별아의 <영영이별 영이별>은 정순왕후가 독백하는 형식으로 된 소설입니다.
세조의 계유정난을 소재로 한 영화와 드라마는 꽤 많았을 것이고, 채시라가 주연으로 나왔던 인수대비도 소개되어 있습니다. 드라마 인수대비는 시대 배경은 맞다만 정순왕후와 관련된 드라마라고 하기에는 좀 애매~~하군요.
연극과 뮤지컬로는 김별아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낭독 콘서트, 정순왕후의 인생역정을 표현한 서사총체극 달에 깃든 나무, 무용극 하늘연인 등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정순왕후 주변 인물들도 봅니다.
정순왕후의 아버지인 송현수는 단종 복위를 꾀하다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의 남편인 정종 역시 유배를 갔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경혜공주와 정종의 아들인 정미수는 자식이 없는 정순왕후를 보살피다 스스로 양자 되기를 청했다 합니다. 그런데 양자인 정미수보다 정순왕후가 9년을 더 살았습니다. 돌아가신 후 해주 정씨 집안 묘역에 안장되었다가 훗날 복위된 뒤 사릉이라는 능호를 받게 됩니다.
해주 정씨 문중에서 정순왕후의 삼년상을 치렀고, 숙종 때 복위뒤어 왕릉이 될 때까지 두 분의 제사도 모셨다는군요.
숭인재 옆쪽에 동망각이라는 안내문과 함께 정자가 서있어서 그 정자가 동망각인가 했는데, 그 옆에 있는 새로 지은 한옥이 동망각입니다.
지역 주민들이 매년 정순왕후의 넋을 기리는 제를 올리는 곳이라 합니다.
기존에 있던 동망각이 지역 재개발 사업으로 철거되어 2017년 이곳에 새로 지은 것입니다.
동망각 옆으로 이어지는 길을 보면 왼쪽으로 숭인근린공원 안내판과 함께 체조기구들이 설치된 작은 운동장(?)이 있습니다.
운동장 한쪽에 정순왕후의 삶을 그림과 함께 소개해 놓았습니다.
세조를 꽤 사악한 표정으로 그려 놓았네요ㅋㅋㅋ
그림 뒤쪽에 있는 동망봉 표지석
체조기구들이 있는 운동장과 동망각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계속 가면 청룡사로 갈 수 있습니다.
절 뒤로 채석장 흔적이 보입니다.
일제는 이곳에서 캐낸 돌로 총독부, 서울역, 경성부청 등을 지었다고 합니다.
청룡사는 비구니들이 계신 사찰입니다.
청룡사 대웅전과 심검당
심검당 지붕의 빗물 내려오는 통이 재미있게 생겼습니다^^
청룡사 우화루는 단종이 영월로 떠나기전 정순왕후와 마지막 밤을 보낸 곳이라 합니다.
두 사람의 마음이 어땠을지....어휴, 맴찢.
청룡사가 있는 자리에는 원래 정업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을 정업원 터 혹은 정업원 구기라고도 합니다.
정업원은 왕가나 양반 출신 여인들이 출가해 머물던 사찰인데, 후궁이었던 사람이 모시던 왕이 돌아가시면 비구니로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정업원은 조선시대에 헐었다 다시 짓기를 반복했는데 지금 자리에 정업원을 세웠던 것은 연산군 때로, 이때 정순왕후가 정업원 스님으로 있었다 합니다.
노산군으로 강봉되었던 단종은 숙종 24년(1698) 정식으로 복위되어 단종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영월에 있던 묘는 장릉이라는 능호를 받았습니다.
정순왕후 역시 함께 복위되어 정순이라는 시호를 받고 묘는 사릉으로 불리게 됩니다.
1771년 8월 영조는 몸소 이곳을 찾아와 정업원이 있던 옛터라는 의미의 '정업원구기' 친필을 내려 비를 세우게 했습니다. 그리고 9월에는 비석과 마주 보고 있는 봉우리의 바위에 동망봉 글자를 새기게 했지요. 하지만 이 바위는 일제 때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청룡사 옆에 정업원구기 비석이 있습니다.
비는 비각 안에 꽁꽁 숨겨져 있고, 비각이나마 찍고 싶어도 그마저도 울타리 때문에 어렵네요.
비각 현판에 쓰인 글자는 전봉후암어천만년, 앞산 뒷바위 천만년을 가리라는 의미입니다.
작은 글자인 세신묘구월육일음체서는 신묘년 9월 6일 눈물을 머금고 쓰다.
여기서 말하는 신묘년은 영조가 이곳을 찾았던 1771년입니다.
그런데 정말 눈물을 머금게 되는 것은 앞산 봉우리가 천만년은 커녕 200년도 되지 않아 깎여나갔다는 거네요ㅠㅠ
정순왕후는 옷감을 물들이는 일로 생계를 삼았는데 그때 염색일을 하던 샘터가 남아 있습니다.
이 샘터는 동망봉과 청룡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네요.
창신 쌍용 아파트 1단지와 2단지 사이 뒤쪽인데, 명신초등학교를 찾으면 쉽습니다.
명신초등학교를 바라보고 오른쪽으로 비우당과 자주동샘 안내판이 서있습니다.
자주동샘이 정순왕후가 염색을 하던 샘이고, 비우당은 지봉유설을 남긴 이수광(1563~1628)이 살던 집입니다.
비우당은 비를 겨우 피할 만한 집을 뜻한다고 합니다.
안내판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가면 초가집이 한 채 보이고, 지봉 이수광이 지은 '비우당기'를 새긴 비가 있습니다.
복원해 놓은 비우당 마당으로 들어서면 집 뒤로 바위가 있고 그 아래 샘터가 보입니다.
지금은 물이 말라 샘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흔적만 남아 있네요.
이 샘을 紫芝洞泉자지동천이라 했는데 자주동천, 자주동샘 등으로도 불립니다.
紫芝자지는 붉은색 염료로 쓰이는 풀인데 낙산 기슭에 많이 자랐다고 합니다.
이 샘물에 비단을 빨아 염색했다고 해서 자지동천이라 불린 겁니다.
정순왕후가 염색한 천을 널어서 말리던 바위에 紫芝洞泉 네 글자가 음각되어 있습니다.
정순왕후는 이곳에서 염색한 천으로 만든 댕기, 고름, 저고리깃, 끝동 등을 내다팔아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이 옷감을 팔아 주려고 여인들이 일부러 자주끝동을 달아 입었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비우당 터 옆에 새로 지은 것이 확연한 작은 절이 있습니다.
얼핏 보면 절이라는 것을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절 이름은 원각사로 단종의 명복을 빌던 절이라 합니다.
60년 넘는 세월을 동쪽 영월 땅을 바라보며 힘겹게 살아가던 정순왕후는 중종 16년(1521) 82세의 나이로 돌아가셨고, 대군 부인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고 합니다.
이번 답사에서는 빠졌지만 정순왕후와 관련된 장소로 영도교도 있습니다.
영도교는 청계천 7가와 8가 사이에 있는 다리로 영미교라고도 합니다.
조선 초기에 처음 만들었고 왕심평대교라 불렀습니다.
잦은 홍수로 다리가 자꾸 훼손되자 성종 때 영도사(지금의 개운사) 승려들을 동원해 돌다리를 놓은 뒤 그 노고를 위로하며 영도교永導橋라는 친필을 내렸다 합니다.
동묘 서쪽 영미사의 승려들을 동원해 다리를 세웠기 때문에 영미교永尾寺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네요.
그런데 사람들 사이에 가장 많이 전하는 이야기는 단종과 정순왕후의 이별에 얽힌 유래담입니다.
단종이 영월로 떠날 때 정순왕후와 이 다리에서 헤어졌는데 그대로 영원한 이별이 되어 버려서 영이별다리, 영영건넌다리 등으로 불리던 것을 한자로 영이별교, 영영교 혹은 건넌다는 뜻의 도자를 써서 영도교라 불렀다는 겁니다.
1950년대말에서 60년대 초에 걸쳐 청계천이 복개될 때 없어졌는데 원래 다리의 모습이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고 지금 다리는 2000년대 초 청계천을 복원할 때 새로 만든 것입니다.
동망봉과 청룡사(정업원 터) 가는 길
전철 1호선 6호선 동묘앞역 10번 출구로 나와 마을버스 03번을 타고 청룡사 앞에서 내립니다.
날이 많이 덥거나 춥지 않으면 동네 구경하며 걸을 만한 거리입니다.
청룡사 앞에서 내릴 경우, 절 반대쪽 방향으로 가서 동망봉 표지석, 동망각, 숭인재, 동망정 등을 보고 되돌아나와야 합니다.
동망정에서 시작하려면 동묘앞역 2번 출구로 나와 큰길 따라 걷다가 낙산 묘각사 방향으로 올라갑니다. 묘각사 조금 지나서 주택들 사이로 동망봉 올라가는 길이 있습니다.
자주동샘 가는 길
명신초등학교를 찾아가면 되는데 03번 마을버스가 청룡사 지나 명신초등학교 앞에도 섭니다.
2정거장밖에 안 되는 거리니 슬슬 걸어도 좋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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