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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방방곡곡

성균관에는 명륜당, 대성전 말고 또 뭐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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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를 보겠다며 찾아갔던 성균관

은행잎이 푸릇푸릇 물이 덜 들어 아쉽기는 했지만 

맨날 책에서 이름만 수없이 들었던 성균관 구석구석을 둘러보는 것도 나름 재미있었습니다. 

 

성균관(서울 문묘)은 성균관대학교 초입에 있습니다.

성균관이 있던 곳에 대학교가 들어선 건데, 그렇다고 개교 600년이라고 우기는 건 쫌.....

 

성균관을 찾아가면 입구에서 먼저 탕평비각을 만나게 됩니다. 

영조는 당쟁의 피해를 막기 위해 인재를 두루 등용하고자 애썼고 이를 널리 알리고자 

1742년 직접 글을 써서 이 비를 세우게 했습니다. 

"두루 사귀어 편당을 짓지 않는 것이 군자의 마음이고,

편을 가르고 두루 사귀지 못하는 것이 소인의 마음이다."

 

 

탕평비가 원래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성균관대학교 정문 자리에 있던 대성문大成門과 가깝다는 이유로 1980년 옮겨왔다고 합니다.

 

탕평비각 옆에 있는 비는 하마비입니다.

大小人員 過此者 皆下馬 대소인원과차개하마

네가 누구든 여기를 지날 때는 말에서 내려라, 그런 내용입니다.

 

이 하마비는 원래 이 자리가 아니라 반촌 입구에 있던 것이라 합니다.

반촌이란 성균관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거주하던 성균관 주변 마을을 말합니다.

 

 

탕평비각 건너편에 큰길을 향해 성균관 표석이 있고

성균관과 그 옆의 유림회관이 보입니다.

 

 

일반인들이 유림회관에 간다면 결혼식 참석이 목적일 텐데

3층에는 예식장이, 1층과 지하에는 연회장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목 그대로 본디 목적은 유림을 위한 시설이겠죠.

한국 유림의 총수라 할 성균관장의 집무실이 있고

성균관 유도회 총본부, 여성 유도회, 전례 연구 위원회, 석전 보존회 등의 사무실이 있습니다.

 

성균관을 들어가려면 유림회관과의 사잇길로 들어섭니다.

 

성균관 영역의 남쪽에, 즉 가장 앞쪽에 문이 있긴 한데 꽁꽁 닫혀 있습니다. 

왜 정문을 두고 옆으로 드나들게 하지? 싶었지만

이 문은 원래 이렇게 닫혀 있는 문인가 봅니다.

 

 

이 문을 신삼문이라 합니다.

궁궐이나 관아 같은 공공 건물의 정문은 삼문으로 되어 있는데

성균관의 이 삼문은 신이 드나드는 문이라 신삼문.

 

이 문을 들어서면 바로 대성전,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고

이 삼문의 정문(가운데 문)은 대성전까지 신도로 이어집니다. 

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인 석전대제 때만 양쪽의 문(동협문, 서협문)이 개방됩니다. 

 

 

유림회관 옆 출입구로 가다 보니 동말문 앞 성균관 안내문 앞에 여러 명이 모여 있습니다.

성균관 답사를 온 일행인 듯합니다. 

 

 

 

안내도를 먼저 눈과 카메라에 담고 출발합니다.

 

 

성균관 동쪽 담 옆은 유료 주차장으로 조성해 놓아 차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이곳에서 성균관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은 2곳입니다.

계단을 올라가는 이 문은 명륜당 뜰로 이어집니다. 대문 혹은 명륜당대문이라 합니다.

 

 

명륜당 대문과 직각 방향에서 남쪽을 향하고 있는 이 문은 전향문입니다.

성균관 유생들 기숙사인 동재와 진사식당 사이로 들어서게 됩니다.

 

 

전향문 옆에 나지막한 월대를 쌓고 평평하게 다져진 곳은 하연대입니다.

임금이 성균관에 왔을 때 연(임금의 가마)을 내려놓는 곳입니다.

 

조선시대 왕들은 종종 성균관에 와서 대성전에 참배한 후

이를 기념해 유생들을 대상으로 과거시험을 열곤 했습니다.

 

임금이 문묘의 공자 위패에 참배하는 것을 알성이라 하고

알성을 기념해서 치른 과거시험을 알성시라 했습니다. 

 

 

먼저 명륜당 뜰로 들어가 봅니다. 

성균관 관람 시간이 적혀 있습니다. 

금연인 것은 지당한 말씀이고, 애완동물도 함께 입장할 수 없습니다.

 

 

가장 먼저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눈에 들어옵니다.

워낙 존재감이 커서 이 나무들이 이 공간의 주인공 같기도 합니다.

 

 

명륜당은 성균관의 강학 공간입니다.

유생들은 이곳에서 강의를 듣고 모르는 것을 질문하며 새로 배운 것을 익힙니다.

지금으로 치면 강의실 쯤 되겠지요. 

 

명륜당은 3동을 하나로 연결한 구조인데

가운데 건물은 마루로 되어 있고 양쪽 건물은 온돌방으로 선생들이 거처했습니다. 

제가 갔던 날 무슨 공사를 하는지 명륜당 주변에 비계를 설치하고 있더군요.

 

 

명륜당 현판은 선조 39년(1606) 명나라에서 사신으로 온 주지번이 썼다합니다.

명륜이란 인간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입니다. 

공자의 말씀을 따르는 유학자들에 걸맞는 공간 작명인가요?

 

그런데 성균관은 물론 지방 학교인 향교에도 명륜당 앞에 은행나무를 심었습니다.

 

공자님이 고향 곡부에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 은행나무 아래에서 수업을 하셨다 합니다.

이것을 행단杏亶이라 하고, 공자의 가르침을 되새기는 의미에서 학교(성균관과 향교)에 은행나무를 심는 겁니다.

 

문제는, 행杏이라는 글자에 살구나무라는 뜻도 있다는 것.

행단이 은행나무인가 살구나무인가 정확하지 않은 모양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은행나무를 심어 놓았습니다.

 

이 나무는 천연기념물 제59호인데 지정된 문화재 이름은 '서울 문묘 은행나무'입니다.

 

문묘란 공자를 모신 사당을 말합니다. 

 

조선은 유학을 근간으로 삼은 나라답게 공자를 받들어 모시는 일을 중시했고

지방마다 공자의 사당인 문묘를 두었습니다.

지방에서는 각 고을의 향교에, 서울에는 성균관에 문묘가 있습니다.

 

성균관과 향교에는 모두 명륜당과 함께 대성전이 있는데

이 대성전이 바로 공자의 위패를 모신 전각입니다.  

 

성균관과 향교는 교육기관이지만 공자를 배향하는 사당으로서의 역할이 컸고, 

어떤 면에서는 이 제사 기능이 더 중시되기도 했습니다. 

 

 

 

명륜당에서 은행나무 맞은편으로 있는 문으로 들어가면 대성전 영역입니다.

 

 

대성전 안에는 공자의 위패를 중심으로 

맹자를 비롯해 유학의 성현으로 추앙받는 분들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이이, 이황, 조광조, 송시열처럼 조선의 유학자들 중 인정받는 분들도 함께 있고요  

 

성균관에 입학한 유생들은 제일 먼저 이 대성전에 와서 참배했습니다.

대성전 참배를 마쳐야 비로소 입학이 인정되었지요.

 

대성전에서 신삼문쪽을 바라본 모습

신삼문 정문까지 신도가 이어져 있습니다. 

 

 

왼쪽으로 보이는 비각은 서울문묘묘정비각, 문묘의 연혁을 기록한 비석입니다.

태종 때인 1410년 처음 묘정비를 세웠다가 임진왜란 때 훼손되어 인조 때인 1626년 다시 세웠습니다.

 

대성전 앞쪽으로 양옆에 동무와 서무가 길게 있는데, 서무는 공사를 하느라 보호막이 쳐져 있더군요.

동무와 서무는 본디 중국의 94현과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모시던 곳인데

1949년 유림 대회의 결정에 따라 한국의 18현을 대성전에 모시고 중국의 94현은 땅에 묻었다 합니다.

그래서 현재는 빈 전각이라 하는군요.

이이, 이황 이런 분들의 위패가 대성전에 있는 게 이때 결정에 따른 일인가 봅니다.

 

대성전에서 다시 되돌아나옵니다.

 

대성전 뒤쪽, 명륜당 앞 은행나무 있는 곳에서 서쪽으로 난 작은 문으로 들어가면 부속건물들이 있습니다.

 

먼저 보게 되는 건물은 전사청과 포주

전사청은 제수용품을 장만하고 보관하던 곳이고

좀더 작은 건물인 포주는 제물을 검사하고 손질하던 곳입니다. 

 

 

 

수복청은 문묘를 관리하던 하인들이 거처하던 곳으로 재학당 혹은 근관직청이라고도 합니다.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는 척 보기에도 창고처럼 생겼네요.

 

 

 

다시 명륜당 뜰로 나옵니다. 

 

명륜당 앞에는 동쪽과 서쪽에 길게 늘어선 전각이 있습니다.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입니다.

동재는 생원들이, 서재는 진사들이 사용했습니다. 

 

성균관의 동재

 

성균관의 서재

 

성균관에는 과거시험 중 소과라고 하는 생원시나 진사시에 합격해야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생원시는 경전 암기 중심이고 진사시는 문장 짓기 위주입니다.

그러니까 성균관 유생들은 기본적으로 이생원, 최진사 이런 사람들인 겁니다. 

 

동재 중간에 있는 문을 지나면 진사식당과 다른 전각들이 있는데

그 전에 먼저 명륜당 뒤쪽에 있는 존경각을 봅니다. 

 

 

존경각은 성균관의 도서관입니다.

성종이 이 존경각을 짓고 만 권의 책을 하사했다는데 

여기에서 '만'은 구체적 숫자라기보다는 많다는 의미 아닐까 혼자 짐작해 봅니다. 

각종 교재와 희귀 서적을 비치했다는데 물론 유교 경전과 역사서만 소장했습니다.

유교 경전과 역사서 외에는 책으로 치지도 않았을 테지요.

중종 때 화재로, 다시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광해군 때 재건되었습니다. 

 

존경각 옆의 육일각은 대사례에 쓰이는 활과 화살을 보관하던 곳입니다.

 

 

유학자들은 활쏘기를 군자가 갖추어야 할 6가지 덕목 중 하나로 여겼고

의식을 치르듯 활쏘기를 하며 사례라 했습니다.

활쏘기에도 예법을 뜻하는 례禮자를 붙였군요.

사례 중에서도 나라에 행사가 있을 때 임금과 신하가 함께 참여하는 것을 대사례라 했습니다. 

대사례는 대개 성균관에서 했다고 합니다. 

 

정조 임금의 활쏘기 실력이 그렇게 좋았다던데

역시 정조는 철저한 유학자였어!!

 

성균관의 육일각은 1743년 영조가 대사례를 행한 뒤 기념으로 건립했다 합니다. 

 

 

이제 다시 명륜당 앞쪽으로 나와 동재 공간을 둘러봅니다. 

동재에 북이 매달려 있습니다. 

 

 

성균관 유생들의 하루는 북소리에 맞추어 시작되었습니다.

북소리가 한 번 울리면 잠을 깨고

두 번 울리면 의관을 갖춰 입은 뒤 단정히 독서를 하고

세 번 울리면 식당으로 향했다 합니다.

 

동재와 서재 모두 명륜당 쪽으로는 창문이 나있고 반대쪽으로 툇마루가 있는 구조입니다.

동재 맞은편에 진사식당이 있습니다.

뭐여, 그러면 생원식당은 따로 있나? 하는 아재개그를 날려 보지만 식당은 하나인 걸로....

 

 

유생들은 식당에 가면 먼저 출석부에 체크를 했습니다.

도기라고 해서 우물 정자 모양의 칸 속에 이름을 쓰고 수결(요즘식으로 하면 사인)을 남겼습니다.

이 도기로 점수를 매깁니다.

아침 저녁 하루 2번 출석하면 원점 1점을 주었는데,

원점이 300점을 넘어야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시간이 돼야 자격을 준다는 의미도 있고, 

자리를 비우지 않고 꾸준히 출석을 해야 한다는 의미도 있었겠지요?

때로는 원점이 과거의 당락을 결정짓기도 했기 때문에

유생들은 아무리 아파도 도기를 하고 밥을 챙겨 먹었다 합니다. 

 

진사식당 앞의 문으로 들어가면 정록청입니다.

성균관의 참하관(정3품 이하 관원)들이 업무를 보던 곳입니다. 

성균관과 관련된 서무와 유생들을 관리 감독하는 업무를 했다 합니다. 

 

 

 

정록청에서 다시 향관청으로 들어가는 문이 보입니다.

 

 

향관청은 본디 제사에 쓰이는 향과 축문을 보관하던 곳인데

제사업무를 주관하는 관리들의 사무실 역할을 했다 합니다.

 

 

향관청 좌우로 있는 동월랑, 서월랑은 성균관의 감사를 담당하는 감찰집사들이 사용하던 건물입니다.

 

 

다시 되돌아 나와 동재와 진사식당 사이로 걸어나오면 

하연대 옆 전향문으로 나오게 됩니다.

 

담으로 둘러싸여 있는 명륜당과 대성전 공간 말고 뒤쪽으로 따로 떨어져 비천당이 있습니다.

명륜당 서쪽에 있는 후향문으로 지나와도 되고, 정문에서 대학 쪽으로 걸어가면 있습니다. 

강당이나 과거 시험장으로 쓰이던 건물입니다.

해방 후 성균관대학교의 대학 본부로 쓰이기도 했는데 한국전쟁 때 불타 버린 것을 1988년 복원했습니다. 

 

 

비천당까지 둘러본 후

가을은 깊어지는데 은행잎은 아직 덜 물들어서 뭔가 아쉬웠던 성균관 답사를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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