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장굴과 함께 천연기념물 98호로 지정돼있는 김녕굴에는 뱀과 관련된 전설이 전합니다. 그래서 굴 이름에 뱀 사蛇를 더해 김녕사굴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김녕굴은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에 있고 길이 705미터에 S자형으로 이어지는 모양이라고 합니다. 원래는 만장굴과 같은 동굴이었는데 천장이 무너지면서 분리되었고, 그래서 천연기념물에 같은 번호로 묶인 모양입니다. 예전에는 자유롭게 드나들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입구에 철조망이 쳐있어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굴 입구에는 비가 서있는데 이 김녕사굴 전설에 나오는 서련 판관을 기리는 공적비입니다. 전설에는 여러 버전이 전하는데 그 중 가장 널리 이야기되는 내용은 이렇습니다.
옛날 이 굴에는 커다란 뱀이 한 마리 살았는데 해마다 제물과 함께 처녀를 바치지 않으면 굴에서 나와 마을 사람들에게 해코지를 하곤 했다. 멀쩡한 딸을 제물로 바치는 집에서는 피눈물이 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러던 어느 해 제주목사로 서련이라는 젊은이가 부임해왔다. 서련은 김녕굴 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말도 안되는 일이라며 분노했고, 그 뱀을 잡아 없애기로 했다.
드디어 뱀에게 제물을 바치는 날, 서련은 심방(무당)과 마을사람들에게 평소처럼 굿을 하게 한 뒤 자신은 군사들과 함께 숨어 있었다. 굿이 한창 무르익고 뱀이 굴에서 나와 처녀를 집어삼키려는 순간, 서련은 군사들과 함께 뛰쳐나와 뱀을 찔러 죽였다.
심방은 서련에게 어서 제주성으로 돌아가라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했다. 서련이 제주성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뒤에서 누군가 피비가 내린다고 소리쳤다.
서련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고,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뱀이 흘린 피가 피비가 되어 서련 판관을 쫓아왔던 것이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서련은 실제로 조선 중종 때 제주판관으로 내려왔던 분입니다. 간혹 서린 판관이라고 전하는 이야기도 있는데 憐자를 린으로 읽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서련은 중종 6년(1511) 18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 이듬해 제주판관으로 내려왔다가 1515년 돌아가셨다는군요.
실존 인물이 전설 속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유형 중 하나 같은데, 그렇다면 과연 서련 판관은 뱀을 물리친 걸까요?
서 판관은 뱀을 죽이기는 했지만 결국 그 뱀의 저주로 죽고 맙니다.
다른 버전의 전설들 속에서도 결과는 모두 같습니다. 버전별로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며 처녀 제물을 요구하는 뱀
이 뱀을 물리치겠다는 주인공
뱀을 죽이는데 성공하는 주인공
하지만 결국 그 뱀의 저주로 죽고 마는 주인공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은 같습니다.
'절 오백 당 오백'이라는 말로 표현되듯이 제주는 예로부터 민간신앙이 강했는데 그 중에는 뱀을 두려워하며 섬기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김녕사굴 전설도 그런 신앙 속에서 나온 이야기일 테고요.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왔던 충암 김정은 제주사람들의 뱀신앙에 대해 <제주풍토록>에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풍속에 뱀을 몹시 꺼려 신으로 받드는데 보면 곧 술로 주문을 외고 감히 쫓아 죽이지 못한다. 나는 곧 멀리서라도 보면 반드시 죽이니 이곳 사람들이 처음에는 크게 놀라더니 오래되어 습관처럼 보아 ‘저 사람은 다른 지방 사람이어서 능히 이와 같이 한다’ 할 뿐이다. 마침내 뱀은 마땅히 죽일 것으로 알지 못하여 의심하니 심히 웃을 만하다. 내가 오래 전에 들으니 이 땅의 뱀들이 매우 번성하여 하늘에서 비 오듯 하고 뱀의 머리가 나란히 나타나 서너 마리씩 성을 누빈다 하였는데 이 경험으로 보아 거짓일 뿐이다. 다만 뱀이 육지보다 많고 내 뜻으로 보아 또한 이곳 사람들이 뱀을 섬기는 일이 과할 뿐이다.
제주도는 기후가 덥고 습하니 뱀이 많았을 테고, 자연스럽게 뱀신앙도 생겨났을 겁니다. 뱀을 수호신으로 모신 곳은 제주뿐만 아니라 육지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충암 선생의 글이나 김녕사굴 설화에 보이는 것처럼 중앙에서 내려온 관리들은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유학사상으로 무장한 양반들 눈에는 당연히 이런 민간신앙이 없애야 할 미신으로 보였을 겁니다. 그래서 서련 판관처럼 뱀을 찔러 죽이는 주인공도 등장하게 되는데,
이야기 결말을 보면 과연 뱀을 물리치는 데 성공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백성들이 양반관리들의 명령 때문에 일단은 무속 행위를 멈추지만 결국에는 그것을 이어나가게 되는 그런 상황을 보여 주는 전개 아닐까 싶네요.
미신타파를 외치는 양반 관리들과 그런 민간 신앙에 기대어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마음이 맞물려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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