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는 조선시대의 궁궐 5곳이 남아 있습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이 그 다섯 곳입니다.
조선의 법궁은 경복궁이었지만 왕이 꼭 경복궁에만 머문 것은 아닙니다.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겨 궁궐을 옮기기도 하고, 기분에 따라 다른 궁궐에 머물기도 했습니다.
이 다섯 궁궐을 한꺼번에 지었던 것은 아니고 처음에 경복궁을 지었다가 이후 창덕궁과 창경궁을 새로 지었지요. 경희궁과 덕수궁은 상황이 조금 다른데, 서울에 남은 조선시대 5대 궁궐을 간단히 알아보겠습니다.
그 전에 먼저! 지금 남아 있는 궁궐들은 원래 모습에서 많이 훼손된 것입니다. 조선을 침탈한 일제는 당연히 조선의 정통성을 부인하려 들었고 이를 위해 벌인 일 중 하나가 궁궐 훼손입니다. 궁궐의 전각들을 이런저런 핑계로 허물거나 옮겨 버린 거지요. 경복궁은 주요 건물 몇 채 외에는 없는 썰렁한 곳이 되었고, 창경궁은 동물원이 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습니다. 경희궁은 거의 터만 남게 되었고요.
지금은 궐 안의 전각을 짓는다거나 창경궁과 종묘를 다시 연결한다거나 하면서 조금씩 옛모습을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조선의 법궁, 경복궁
우리나라 사람이든 외국인 여행객이든 가장 많이 찾는 궁궐이 경복궁입니다. 경복궁은 1392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가장 먼저 지은 궁궐입니다. 1394년 한양으로 천도하고 궁궐을 짓기 시작해 이듬해 9월 완성되었습니다.
'경복'이라는 궁 이름은 개국 공신 정도전이 지었는데 <시경>에 있는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불렀으니 군자 만년에 큰 경복일레라.” 하는 구절에서 따온 것입니다. 왕의 어진 은혜와 정치로 백성들이 걱정 없이 잘살기를 바라는 뜻이 담긴 이름입니다.
정문인 광화문은 경복궁과는 별개로 유명합니다. 광화문 광장이니 광화문 사거리니 하는 이름을 많이 듣다 보니 마치 광화문이 별개의 문 같은 착각도 때로 들지만 엄연히 경복궁의 정문입니다.
'광화'라는 이름은 “광피사표 화급만방”이란 말에서 따왔습니다. “빛이 나라 밖 사방을 덮고, 교화가 만방에 미친다”는 뜻이지요.
경복궁은 명실상부 조선의 법궁이었습니다. 창덕궁을 지은 후에도 조선의 법궁으로서 기능했지만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리고 말았습니다. 중건되지 못한 채 폐허로 있다가 고종 때 대원군이 대대적으로 재건하며 규모도 더 커졌습니다.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본 모습을 많이 잃게 됩니다.
경복궁 정전인 근정전
옛 모습이 가장 잘 남아 있는 창덕궁
창덕궁은 태종 5년(1405) 세워진 조선의 두 번째 궁궐입니다. 창덕궁은 조선 궁궐 중 가장 오래 사용되었고, 옛 모습도 비교적 잘 남아 있습니다.
경복궁이 정문부터 침전까지 일직선으로 배치된 것과 달리 창덕궁은 산자락을 따라가며 자연에 안기듯 건물들을 배치했습니다.
경복궁과 함께 임진왜란 때 불타 버렸다가 광해군 때 다시 지었습니다. 이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해서 옮겨갈 때까지 조선의 궁궐은 창덕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장희빈 이야기처럼 임진왜란 이후가 시대 배경인 사극에서 나오는 궁궐은 창덕궁입니다.
창덕궁에 들어서면 큰 회화나무 3그루가 눈에 띄는데, 궁궐 짓는 예법에 의하면 궁궐 문 안에 회화나무를 세 그루 심어 삼정승이 그 밑에 앉았다고 합니다.
창덕궁은 특히 후원이 아름답기로 유명합니다. 한때는 이 후원을 비원이라 했고 창덕궁이라는 정식 명칭보다 널리 쓰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잘 쓰이지 않지요.
후원은 궁궐에 있는 사람들의 휴식 공간이지만 때로는 과거 시험장이나 왕이 참관하는 군사 훈련장으로도 쓰였습니다. 작은 논을 만들어 두고 농사 과정을 살펴보기도 했군요.
동궐도
창덕궁과 함께 동궐을 이룬 창경궁
창경궁은 본디 수강궁이라 했던 곳입니다. 태종이 왕위를 아들인 세종에게 주고 물러나던 1418년 세종이 아버지 를 위해 마련한 곳이지요. 성종 14년(1483) 성종이 이 수강궁을 수리 확장하며 창경궁이라 했습니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함께 동궐로 불리는데, 경복궁 동쪽에 있다고 해서 그렇습니다.
창경궁은 처음에는 크게 쓰이지 않았지만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중건한 후 창덕궁과 함께 중요하게 쓰였습니다. 다른 궁궐들이 모두 남향을 한 것과 달리 정문인 홍화문과 정전인 명정전 등이 모두 동향으로 배치되었습니다.
인조 때 이괄의 난과 순조 때 화재 등으로 내전이 불타 버렸고, 이때 화재를 면한 홍화문, 명정문, 명정전 등은 17세기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건물로 꼽히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고 창경원으로 격을 낮추어 버렸는데, 해방 후에도 오랫동안 공원으로 쓰이다가 1980년대에야 궁궐의 모습을 되찾았습니다.(해방 후 40년이나 지나서라니...참 많이 늦었지요ㅠㅠ)
창경궁 정문 홍화문
흔적만 간신히 남은 경희궁
조선 궁궐치고 이리저리 뜯기고 헐리지 않은 곳이 없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심한 곳이 경희궁입니다. 그래서 사적 271호는 경희궁이 아니라 ‘경희궁지’입니다. 경희궁이 있던 터라는 말인데, 서울역사박물관이 있는 곳이 바로 ‘경희궁지’입니다.
광해군이 경덕궁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세웠고, 영조 때 경희궁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고종 때까지도 궁궐로 사용되었는데, 일제가 일본인 학교를 세우면서 헐기 시작해 1920년대에는 거의 궁궐 아닌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게다가 터까지 많이 파괴되어 버렸지요. 지금은 정문인 흥화문을 찾아다 놓기는 했는데 원래 자리가 아닌 엉뚱한 곳에 서있고, 1990년대에 숭정전 일대를 복원해 놓았습니다.
경희궁 정문이었던 흥화문
구한말 역사가 서려 있는 덕수궁(경운궁)
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경운궁입니다. 임진왜란 때 궁궐이 모두 불타 버리자 월산대군(성종의 형)이 살던 집을 임시 궁궐로 사용했는데, 광해군이 경운궁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경운궁은 창덕궁을 중건한 후 비어 있다가 고종 때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을미사변(일본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 후 일본의 위협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던 고종이 환궁할 때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간 것입니다.
경운궁은 1904년 큰 불이 나서 대부분 불타 버리고 지금 남은 건물은 그 이후에 지은 것들입니다. 다른 궁궐의 정전들은 2층인 데 비해 경운궁(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은 단층 건물인데, 이때 줄여 지어서 그렇습니다.
1907년 일제는 고종에게 강제로 왕위를 순종에게 물려주게 한 뒤 덕수궁이라는 호칭을 붙였습니다. 자리에서 물러난 왕에게 만수무강하시라는 뜻에서 붙이는 호칭인데, 이것이 궁궐 이름처럼 돼버린 겁니다.
덕수궁에는 석조전이나 정관헌처럼 다른 궁궐에서 볼 수 없는 양식 건물이 있는데, 구한말에 사용되고 새로 짓고 해서 그런 것입니다.
덕수궁 정관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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