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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실

단종실록과 노산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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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고종까지 임금별로 편찬되어 있는데, 각 임금이 서거한 뒤 만든 것입니다.

왕이 서거하면 실록청이 설치되고, 사관이 기록해 놓은 사초와 승정원일기 등 그동안의 기록을 모두 모아 실록을 작성하게 됩니다.

편찬된 실록은 세종장헌대왕실록, 성종대왕실록 하는 식으로 해당 왕의 묘호를 붙여 부릅니다. 우리는 간단히 세종실록, 성종실록 이런 식으로 부르고 있지요.

그런데 태조실록부터 고종실록까지 조선시대 스물일곱 임금의 실록 중 두 실록에는 일기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연산군일기와 광해군일기가 그것인데, 반정으로 폐위되었기 때문에 -종이나 -조라는 묘호를 받지 못했고 기록도 실록이 아닌 일기로 남게 됩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 중 연산군일기와 광해군일기 외에 또 다른 일기가 있었습니다. 단종실록이 처음에는 노산군일기로 만들어졌던 것인데,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 의해 폐위된 뒤 '노산군'으로 강등되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정당성으로 따지자면 아무 문제 없는 조카를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야말로 자격이 없는 건데, 적장자로서 정당하게 왕위를 계승한 단종을 노산군이라고 깎아내린 겁니다.

단종(1441~1457)은 즉위 3년 만인 1455년 6월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납니다. 말이 좋아 상왕이지 왕 자리에서 쫓겨난 겁니다. 조카가 상왕이 되고 삼촌이 왕이 되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겁니다.

이후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움직임이 끊이지 않았고, 집현전 학사인 성삼문, 박팽년 등의 복위운동이 발각되면서 조정에는 한바탕 피바람이 불게 됩니다. 이때 희생된 학사들이 사육신死六臣이라 일컬어집니다. 서울 노량진에 이분들을 모신 사육신묘가 있습니다.

사육신묘 중 유응부의 묘

사육신의 복위 계획이 들통난 뒤 세조(수양대군)는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시켜 영월로 유배 보냈습니다. 단종은 1457년 6월 22일 창덕궁을 출발해 6월 28일 영월의 청령포에 도착했다고 합니다.단종은 청령포에서 2개월을 지내다 홍수가 나자 영월 객사인 관풍헌으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었습니다. 금성대군은 세종대왕의 여섯째 아들이니 수양대군에게는 친동생이고 단종에게는 숙부입니다.

금성대군은 앞서 사육신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했던 일에 연루돼 순흥에 유배 가 있었는데 다시 복위운동을 꾸미다 발각된 것입니다.

이해 9월과 10월 조정에서는 금성대군과 단종에 대한 처벌을 두고 논의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금성대군이야 단종을 복위시키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 여겼을 것이지만 세조와 그 측근들로서는 이미 왕위를 차지했으니 금성대군의 행위를 역모라 여겼지요. 단종이 살아있는 한 복위 움직임이 계속될 테니 결단을 내려야 했을 겁니다.

결국 10월 21일 단종은 목숨을 잃게 됩니다. 세조실록에는 "노산군이 스스로 목매어 졸하니 예로써 장사지냈다"고 했지만 사실은 세조가 사약을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 사실이 선조실록에 남아있습니다. 선조 2년 5월 21일 기대승이 선조에게 선대의 일을 아뢰는 중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 영월로 옮겨가 있었고, 그때 정인지가 영의정이 되어 백관을 거느리고 처치(處置)하기를 청하니,

세조는 물정(物情)에 구애되어 허락하셨습니다.

이에 금부도사를 보내어 영월에서 사약(賜藥)하였으니 그 공사(公事)가 지금도 금부(禁府)에 남아 있습니다."

세조는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신하들이 주장해서 어쩔 수 없이 사약을 내렸다는 식이지만 어쨌든 세조가 단종의 목숨을 끊은 건 사실입니다.

단종은 어린 나이에 억울하게 죽은 것도 모자라 시신도 수습되지 못한 채 방치되었습니다.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는 자는 삼족을 멸하겠다는 서슬퍼런 세조의 명 때문이었습니다.

다행히 영월 호장 엄흥도가 목숨을 걸고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몰래 묻어주었습니다. 영월에 있는 단종의 묘인 장릉

에는 엄홍도의 이 의로운 행위를 기리는 정려비가 있습니다.

영월 장릉에 있는 엄흥도 정려비각

영월군수 박충원과 관련된 이야기도전합니다. 박충원이 영월군수로 부임한 날 밤 단종이 나타나 자신이 묻혀 있는 곳이 불편하니 옮겨 달라고 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꿈이었고, 이에 박충원이 단종이 묻힌 곳을 찾아내 잘 묻고 정중하게 제사를 지내 주었다는 겁니다.

중종 때부터는 조정에서 단종의 제사를 지내 줍니다. 기록에 의하면 중종 11년(1516) 노산균 묘를 찾아내 그해 12월 치제했고 , 중종 35년(1540) 8월에도 노산군 묘에 사제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치제致祭란 임금이 제물과 제문을 보내어 죽은 신하를 제사 지내는 것이고, 사제賜祭 역시 임금이 죽은 신하에게 제사를 내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대 왕으로서 예우한 게 아니라, 제를 지내줄 뿐 여전히 노산군으로 취급한 겁니다. 중종은 세조의 증손자이니 할아버지가 강봉시킨 노산군(단종)을 선대왕으로 대하기 어려웠으리라 짐작됩니다.

선조와 광해군을 거치며 묘역에 석물을 세우고 사당을 세웠지만 이때도 여전히 노산군묘였습니다.

단종 복위는 숙종 때 정식으로 논의되고 실현되었습니다.

먼저 숙종 7년(1681) 노산대군으로 추봉되었습니다. '군'과 '대군'은 또 다릅니다. 대군은 왕과 왕비 사이에 낳은 왕자이고 군은 왕과 후궁 사이의 왕자입니다. 대신 중 공이 큰 사람에게 군 칭호를 하사하기도 했습니다. 단종을 노산군이라 한 것은 신하에게 내리는 칭호로서의 군이었겠지요? 그런데 이제 대군의 위치를 돌려 준 셈입니다.

숙종 24년(1698) 9월 신규申奎가 노산군의 왕호를 추복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이에 숙종이 널리 의견을 묻자 찬반으로 의견이 나뉩니다.

시골 아낙네와 어린아이까지 슬퍼하는 일이니 민심을 받들어 복위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고, 선조先祖에 관계된 일이므로 쉽게 결정할 수 없다는 신중론도 있었습니다.

결국 10월 24일 단종의 복위가 결정되었고, 11월 6일에는 시호를 순정안장경순대왕으로, 묘호를 단종으로, 능호를 장릉으로 정하게 됩니다.

단종이 폐위될 때 함께 쫓겨났던 부인도 군부인에서 왕후로 복위되며 '정순'이라는 시호를 받게 됩니다.

숙종실록 24년 11월 6일 기사에 이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산대군의 시호를 추상(追上)하여 ‘순정 안장 경순 대왕(純定安莊景順大王)’이라 하였는데, 중정정수(中正精粹)함을 순(純)이라 하고, 대려자인(大慮慈仁)을 정(定)이라 하고, 화합을 좋아하고 다투지 않음을 안(安)이라 하고, 올바른 것을 실천하여 뜻이 화(和)한 것을 장(壯)이라 하고, 의(義)로 말미암아 구제하는 것을 경(景)이라 하고, 자애롭고 화목하여 두루 복종하는 것을 순(順)이라 한다 하였다. 묘호는 단종(端宗)이라 하니, 예를 지키고 의를 잡음을 단(端)이라 한다. 능호(陵號)는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부인의 시호(諡號)를 ‘정순(定順)’이라 하니, 순행(純行)하여 어그러짐이 없음을 정(定)이라 하고, 이치에 화합하는 것을 순(順)이라 한다 하였다. 휘호(徽號)를 단량 제경(端良齊敬)이라 하니, 예를 지키고 의를 붙잡는 것을 단(端)이라 하고, 중심(中心)으로 일을 공경하는 것을 양(良)이라 하고, 마음을 잡아 능히 엄정할 수 있음을 제(齊)라 하고, 밤낮으로 공경하고 삼감을 경(敬)이라 한다 하였다. 능호는 ‘사릉(思陵)’이라 하였다."

한줄 요약!

묘호를 단종이라 하고 능은 장릉이라 한다. 부인은 정순왕후라 하고 능은 사릉이라 한다.

단종대왕으로 복위되었으니 연산군일기로 남아 있던 실록도 단종대왕실록으로 바뀌게 됩니다. 하지만 표지만 바뀌었을 뿐 내용은 그대로 입니다.

단종실록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노산군(魯山君)의 휘(諱)는 홍위(弘暐)이고, 문종(文宗) 공순왕(恭順王)의 외아들인데 어머니는 권씨(權氏)이다."

표지에는 단종대왕실록이라 적혀 있지만 내용에는 노산군이라고 되어 있다.

본디 실록에서 왕을 언급할 때는 상上이라고 하는데 단종실록에서는 노산군이라 칭하는 것입니다.

본문까지 모두 바꾸기에는 무리였던 모양입니다.

만약 단종이 복위되지 못했다면 어쨌을까요? 물론 폭정을 해서 쫓겨난 것도 아니고, 억울하게 죽은 것을 후대의 우리들이 모두 알아주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호칭은 영원히 노산군으로 남았을 테지요.

그랬더라면 정말이지 하늘에서도 원통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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