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1676∼1759)의 그림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무엇일까요?
'인왕제색도'라고 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네요. 또, 인왕제색도라는 제목은 몰라도 그림을 보여 주면 대개는 아하, 하면서 알아볼 것 같습니다. 특히 서울에 살고 시내를 다녀본 사람이라면 그림의 배경을 실제로 본 적도 많을 거고요.
국보 216호 정선필 인왕제색도
비 개인 모습은 아니지만, 인왕산
광화문 언저리 어디쯤에서 보면 인왕제색도에 묘사된 각도의 산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을 마주하면 "인왕제색도가 왜 그런 모습인지 알겠다!"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옵니다.
(너무 당연한 거 아닌가? 인왕산을 보고 그렸는데!!)
인왕제색도는 국보 21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그림 크기는 가로 138.2㎝, 세로 79.2㎝
정선이 남긴 400점 넘는 그림 중 가장 크다고 합니다.
이 그림은 비가 개이면서 안개가 피어오르는 인왕산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비에 젖은 암벽의 무거운 느낌을 나타내기 위해 먹물을 가득 묻힌 큰 붓을 반복해서 아래로 내리긋는 대담한 필치를사용했다는군요.
'비온 뒤 인왕산의 모습'을 그렸다고 해서 '인왕제색'도입니다.
인왕제색도仁王霽色 = 인왕仁王 + 제색霽色 + 도圖
인왕은 산 이름입니다. 청와대 뒤쪽에 거대한 암벽을 드러내고 있는 산으로, 1968년 김신조 사건이 있었던 탓에 청와대 경호 문제로 오랫동안 출입이 통제되었다가 1993년 일부 개방되었고, 2018년 인왕산의 나머지 구간까지 완전 개방되었군요.
제색은 비 개인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霽라는 글자가 '비 개일 제'자입니다. 한자가 글자 하나하나에 의미가 있는 표의문자라는 건 알았지만, 비가 개었다는 뜻의 글자까지 있다니 정말 별 글자가 다 있다 싶습니다^.^
色은 어떤 모습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합쳐서 비 개인 모습
한자만 제대로 알고 있으면 문화재 이름만 보고도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더니
정말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거리고 싶지만....비가 개었다는 뜻의 글자까지 알고 있는 게 가능?
강세황이 이 그림에 남긴 발문은 이렇습니다.
寫眞景者 每患似乎地圖 而此幅旣得十分逼眞 且不失畵家諸法
응? 뭐라고? 무슨 소린가 싶어 학자 분이 풀이해 놓은 것을 보니
"우리 산천의 실제 모습을 그린 작품은 매번 지도와 비슷해서 너무 무미건조한 점이 걱정이었는데, 이 그림은 이미 충분히 사실적이면서 또한 화가의 법식을 잃지 않았다."
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경희궁 숭정문 뒤로 보이는 인왕산
인왕제색도가 비 개인 모습을 그린 거라는데, 그래서 안개 핀 모습을 그렸다는데 정말 비온 모습을 보고 그린 걸까? 겸재 정선이 인왕산이 보이는 동네에 살았으니 익숙한 모습이라 그냥 그린 게 아닐까?
그런 쓸 데 없는 의심(?)을 하는 사람은 물론 없겠지만, 정말로 비 개인 날 인왕산을 보고 그렸다는 것을 승정원일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정선이 왕족도 아닌데 승정원일기에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요, 날씨에 관한 기록을 보면 됩니다.
겸재 정선이 인왕제색도를 그린 날짜는 辛未閏月下浣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때 신미년은 1751년이고 이 해의 윤달은 5월입니다. 그러니까 인왕제색도를 그린 때는 1751년 윤5월 하순이 됩니다.
승정원일기는 매일 기록하는데 항상 그날의 날씨를 적고 시작합니다.
晴은 맑음, 雨는 비, 朝雨夕晴는 아침에 비가 내리다 저녁에 갬, 晨雪朝晴는 새벽에 눈 내리고 아침에 갬
이런 식입니다.
승정원일기에서 1751년 윤5월의 날씨를 보면
윤5월 18일까지는 며칠에 한 번 비가 내렸고 19일부터 24일까지 비(雨), 25일에는 아침에 비가 내리다 저녁에 갬(朝雨夕晴), 26일부터 맑음(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윤5월이면 양력으로 6월 하순에서 7월 정도가 됩니다. 며칠 동안 계속 비가 내린 걸 보면 장마가 졌던 모양입니다. 그러다 26일에 날이 개입니다.
며칠 동안 비가 내리다 개었을 때의 기분, 우리도 잘 압니다. 산줄기 사이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만들어내는 경치는 얼마나 멋진지요!
그림에 일가견이 있던 정선이 눈앞에 펼쳐지는 그 모습을 보고 붓을 들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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