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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실

왕자를 때리고도 목숨을 부지한 내시 (ft. 세종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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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을 때리는 건 안됩니다!

도덕적으로도 그렇고 법적으로도 문제가 됩니다.

특히 장유유서 의식 때문인지 어쩐지 어린 사람이 연장자를 때리거나 직위가 낮은 사람이 상사를 때린다면 더욱 크게 비난 받습니다.(사실 폭력은 나이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나쁜 건데)

 

유교 사회였던 조선에서는 그 정도가 훨씬 심했을 겁니다.

특히 신분제 사회였으니 아랫사람이 상전을 때리는 행위는 일반 폭행 사건보다 더욱 큰 처벌을 받았습니다.

평민이 양반을 때렸다면 같은 평민을 때린 것보다 훨씬 엄하게 처벌받는 겁니다.

만일 노비가 상전을 때렸다면 목숨을 내놔야 하는 거고요.

 

그런데 그 상전이 왕자님이라면 어떨까요?

그야말로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듯한데, 왕자를 때려놓고도 관대한 임금님 덕분에 목숨을 건진 내시가 있었습니다.

세종 임금 때 임수林秀라는 내시가 왕자를 구타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임수가 왕자를 모시고 글을 읽는데, 임수가 무례하게 굴어 왕자가 미워했다고 합니다.

임수는 왕자를 업신여기며 욕보이기까지 했다는군요.

실록에는 임수가 왕자를 능욕(凌辱)했다고 나옵니다.

그래서 화가 난 왕자가 주먹으로 임수의 뺨을 때렸는데, 사실 당시 사회에서 이런 일은 문제도 아닙니다. 

맞은 내시야 속으로 부글거릴지언정 감히 맞았다고 억울해하거나 화를 내지 못하는 거지요.

심지어 왕자가 아랫사람을 죽이더라도 꾸중을 듣는 정도로 끝나던 시대니까요.

물론, 사람을 죽일 정도로 고약한 왕자가 그리 많지는 않았겠지만요.

아니 그런데! 임수 역시 왕자의 어깨를 때렸다고 합니다.

그것도 흔적이 남을 정도로요.

상대가 왕자인데, 어쩌자고 이런 대담한 짓을 한 걸까요?

정말 간이 배밖으로 튀어 나왔거나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건 꼴입니다.

내시에게 맞은 이 왕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세종대왕에게는 아들이 18명이나(딸도 4명) 있었는데(다산왕 세종!), 실록에는 왕자라고만 되어 있어서요.

 

당연히 임수는 의금부로 넘겨졌고, 법적인 판결은 "교형(絞刑)에 해당함"이었습니다.

교형은 목을 매달아 죽이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사형에도 끕~이 있었는데, 교형은 목을 치는 참형보다는 덜한 처벌입니다.

목이 졸리나 떨어지나 죽는 건 마찬가지지만 신체가 훼손되지 않는 게 그나마 나은 형벌입니다.

어쨌든 임수는 목숨을 내놓게 됐습니다.

 

중죄인에 대한 처벌, 그중에서도 특히 사형에 해당하는 죄는 왕의 허락이 있어야 최종 확정되어 집행을 하는데, 세종대왕은 임수의 처벌 등급을 낮추어 곤장 1백대에 관노로 삼도록 했습니다.

목숨을 살려 준 것입니다.

 

그러자 사간원 헌납이 "임수는 당연히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상대가 왕자라고 해서 사람 때린 걸로 사형까지 시키나 싶지만 그게 당시의 법이고 도덕이었습니다.

헌납은 원칙을 지키려 한 것이고요.

하지만 세종대왕의 답변인즉슨

"말은 비록 옳으나, 사람을 많이 죽이는 것은 옳지 못하다."

였습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의 세종 버전인 건가요?

 

 

형법을 집행할 때, 일단 판결이 났더라도 확정 과정에서 처벌 등급을 낮추어 주는 경우가 꽤 있었습니다.

중죄인에 대한 처결은 조정에서 의논을 거쳐 집행했고, 특히 사형 집행은 반드시 임금의 허락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형에 해당하는 죄인의 경우 반인륜적인 죄를 저지르지 않은 이상 가능하면 유배형이나 도형으로 감형시켜 목숨을 살려 주었습니다.

물론 역모죄의 경우에는 얄짤없이!

비록 법이 있다고는 해도 가혹한 처벌만이 능사가 아니고, 교화를 통해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세종대왕 역시 의금부나 형조에서 "이 죄는 참형에 해당합니다" 혹은 "교형에 해당합니다"라고 보고를 하더라도 웬간하면 한두 등급을 감해 주곤 했습니다.

그 이유는 내관 임수의 목숨을 살려주며 했던 그 말 속에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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