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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방방곡곡

[장릉] 영월에 외따로 있는 단종의 무덤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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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을 갈 때마다 가봐야지 가봐야지 했던 장릉을 얼마 전에 드디어 다녀왔습니다^^

장릉莊陵은 조선 6대 임금인 단종端宗의 무덤입니다. 조선의 왕릉이 대부분 한양과 가까운 곳에 조성된 것과 달리 단종만은 산넘고 물건너 머나먼 영월에 잠들어 있는데,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죄인의 신분으로 유배 왔다가 이곳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장릉은 영월읍내에 있어 대중교통으로 찾아가는 데도 무리가 없고, 혹시 강원도 여행길에 영월 근처를 지나게 된다면 시간을 내서 가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장릉 입구입니다. 읍 외곽에 그저 왕릉 하나 있으려니 생각했는데 근처에 가게들이 제법 있더군요. 관광버스까지 서는 걸 보니 나름 영월의 명소인 것 같습니다.

 

 

 

조선왕릉이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임을 알리는 표지석입니다.

 

 

 

입장료는 성인 1,400원이고 청소년과 어린이는 1,200원입니다. 영월군민은 50% 할인이군요.

 

 

 

안으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오른쪽으로 박충원 낙촌비각이 보입니다.

 

 

 

비각 앞의 안내문에 적힌 내용을 보니

박충원의 충신됨을 널리 알리기 위해 1973년에 세웠는데, 중종 11년(1516) 어명에 따라 노산묘를 찾아 치제하였으나 방치되었던 것을 중종 36년(1541년) 영월군수로 부임한 박충원이 현몽에 의해 봉축하고 건물을 갖추고 제문을 지어 치제하였다고 합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 꿈에서 뭘 어쨌다고? 이런 불친절한 안내문 같으니!

세계유산 씩이나 되는 왕릉의 안내문이 이리 부실하다니 원......

안내문을 봐도 뭔 소린지 모르겠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전설 따라 삼천리 버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박충원이 단종의 묘를 찾아냈다는 것인데, 역사적 사실은 좀 다릅니다^^ 

중종실록에는 11년 12월 10일에 노산군 묘에 치제했다는 내용과 함께 무덤의 위치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중종실록 11년 12월 10일

 

우승지 신상(申鏛)을 보내 노산군(魯山君)의 묘에 치제(致祭)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 중략 ]

 

또 논한다. 신상(申鏛)이 와서 복명하고, 김안국과 함께 말하다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며 ‘묘는 영월군 서쪽 5리 길 곁에 있는데 높이가 겨우 두 자쯤 되고, 여러 무덤이 곁에 총총했으나 고을 사람들이 군왕의 묘라 부르므로 비록 어린이들이라도 식별할 수 있었고, 사람들 말이 「당초 돌아갔을 때 온 고을이 황급하였는데, 고을 아전 엄흥도(嚴興道)란 사람이 찾아가 곡하고 관을 갖추어 장사했다.」 하며, 고을 사람들이 지금도 애상(哀傷)스럽게 여긴다.’ 하였다.

 

 

또, 박충원 비각 안내문에는 중종 11년에 무덤을 찾았으나 방치되었다고 했지만, 중종실록 35년 8월 4일에도 승지를 보내 제를 지내는 일에 대해 언급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박충원의 꿈 이야기는 아마도 단종의 억울한 죽음을 안타까워한 민심이 보태져서 각색된 이야기일 겁니다. 이런 전설 따라 삼천리 버전의 이야기들이야 민간에서 흔히 전해지는 것이고, 나름 의미가 있는 전승이지만, 그래도 유적지에서는 사실에 기반한 내용을 적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게다가 '박충원 낙촌비각'이라고 해놓아서, 비각은 알겠는데 낙촌비각이 뭐지? 고개를 갸웃거렸는데 낙촌이 박충원 호였군요. '낙촌 박충원 비각'이라고 했으면 금방 이해했을 것을.....

유적지 관리에서 이런 일은 사소한 듯하지만 결코 사소하지만은 않은 아쉬운 부분입니다.

 

 

낙촌비각 옆에는 단종에 관한 자료들을 전시해 놓은 단종역사관이 있습니다.

 

 

 

왕릉은 대개 홍살문을 지나 참도를 통해 정자각으로 이어지고 그 뒤에 봉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장릉에서는 배치가 좀 다릅니다.

장릉 안내 리플렛에 있는 배치도입니다. 낙촌비각도 그렇고, 다른 왕릉에는 없는 건물이 제법 보입니다.

 

(클릭하면 크게 보입니다)

 

낙촌비각에서 보니 홍살문은 저 앞쪽에 보이는데 능으로 가는 길은 비각 옆에 있습니다. 

일단 능으로 올라갑니다. 소나무가 양옆으로 늘어선 길이 청신합니다. 왕릉이라는 사실을 빼고 보면 훌륭한 산책로로 손색이 없습니다. 

 

 

 

소나무들 사이로 멀리 단종의 무덤이 보입니다.

 

 

 

단종의 무덤에는 문인석만 있고 무인석이 없습니다. 무력에 의해 왕위를 빼앗겼기 때문에 이리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덤 근처의 소나무들이 장관입니다. 능 건너편 봉우리의 소나무들도 그렇고, 장릉 주변에는 유난히 소나무가 많아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어 줍니다.

 

 

 

능 앞에 내려가는 길 표시된 계단이 있는데 이곳을 내려오면 왼쪽은 엄홍도 정려각이고 오른쪽은 장판옥입니다. 

홍살문 뒤로 엄흥도를 기리는 비가 보입니다.

 

 

 

정려旌閭란 충신, 효부, 열녀 등의 뜻을 기리기 위해 붉은 칠을 한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는 것입니다.

엄흥도에게 정려를 내린 것은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준 충절을 기리기 위해서입니다.

단종은 1452년 즉위했다가 3년 만인 1455년 6월 수양대군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납니다. 하지만 말이 상왕이지 어른 대접을 받았을 리 없습니다. 그러다 성삼문, 박팽년 등의 복위 계획이 발각되면서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 되었고, 1457년에는 단종의 숙부이자 수양대군의 동생인 금성대군의 복위 계획이 들통나면서 결국 사약을 받게 됩니다. 이때 나이 17세, 젊다는 표현조차 쓸 수 없는,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세조실록에는 "예로써 장사지냈다"고 했지만 이것은 기록만 그리 했던 것이고, 실제로는 시신을 수습하는 자는 삼족을 멸하겠다는 어명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그 살벌한 분위기에서 영월 호장이었던 엄흥도는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당해도 나는 달게 받겠다."고 하며  단종의 시신을 수습했습니다.

엄흥도와 세 아들은 함께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동을지산 기슭에 묻은 뒤 뿔뿔이 흩어졌는데, 엄홍도와 큰아들은 공주 동학사로 가서 매월당 김시습과 단종의 3년상을 치렀다는군요. 이후 행방은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이 정려각은 영조 2년(1726) 세운 것입니다. 처음에 청주에 세웠다가 1759년 영월로 옮겼는데 세월이 흘러 허물어지자 1970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고 합니다.

일개 향리의 비가 왕릉에 함께 있다니,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입니다^^

엄흥도는 순조 33년(1833) 공조판서로 추증되었고, 고종 13년(1876)에는 충의공忠毅公이라는 시호를 받았습니다.

 

장판옥藏版屋은 여러 사람의 위패를 한데 모신 곳입니다. 

 

 

안내문에 적힌 설명을 보니

정조 15년(1791) 건립한 것으로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위忠臣位 32인, 조사朝士位 186인, 환자군노宦者軍奴 44인, 여인위女人位 6인을 합하여 268인의 위패를 모셨다고 합니다.

조사가 뭔가 하고 찾아보니 조정에 몸담고 있는 신하라고 합니다. 환자는 환관, 즉 내시를 말하는 것일 테고, 군노는 관청에 딸린 종입니다.

아이고, 유적지 안내문 하나 읽는데도 이렇게 어려우니 어찌할까요~~~

 

여인위에 적힌 사람들을 보니 궁녀 1명, 궁비 2명, 무녀 3명입니다.

단종이 사사되자 유배 올 때 따라온 시녀들이 청령포 뒤쪽 절벽에서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궁녀와 궁비는 그 여인들일까요? 그런데 무녀 3명이 함께 있는 것이 이채롭습니다.

 

 

 

장판옥 맞은편에는 이곳에 제를 지내는 배식단이 있습니다.

 

 

 

이제 드디어 홍살문입니다. 홍살문은 그 너머가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문입니다. 둥근 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쪽에 살을 박아 만듭니다. 

문 너머로 보이는 나무는 느릅나무인데 370년이나 됐다고 합니다.

 

 

 

원래 왕릉 배치를 보면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참도가 일직선으로 이어지는데 장릉에서는 중간에 90도로 꺾어집니다. 

 

 

 

정자각은 제를 모실 때 왕의 위패를 모시는 곳으로 봉분이 이 뒤에 나란히 놓이게 되는데, 이 방향이나 위치 역시 장릉에서는 맞지 않습니다. 

정자각 뒤가 언덕처럼 솟아 있고, 그 위에 봉분이 정자각과는 직각 방향으로 놓여 있습니다. 

무덤 터를 따로 잡아서 조성한 것이 아니라 있는 곳에서 능을 조성하려니 지형 조건 때문에 그리 된 모양입니다.

 

 

 

 

묘역 가장 안쪽에 있는 영천靈泉은 한식에 제를 지낼 때 사용하던 샘입니다. 정조 15년(1791) 영월부사 박기정이 어명에 따라 수축했다 합니다.     

 

 

 

중종대 이후 무덤이 정비되고 제향도 올렸지만 복위가 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내내 노산군으로 불리다가 숙종 24년(1698)에야 복위되면서 단종이라는 묘호와 장릉이라는 능호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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