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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방방곡곡

밀양 표충사에서 만나는 사명대사의 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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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이름은 참 익숙한데 정작 가보지 못한 곳들 중 하나가 밀양 표충사입니다.

 

표충사 하면 사명대사가 생각나긴 하는데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는 없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켰던 사명대사이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당연히 추앙을 받는 분이고, 그 사명대사랑 인연이 깊은 절이라는 정도였지요.

명성이 있으니 절이 아담할 거라는 생각은 안 했지만, 막상 가보니 생각보다 무척 큰 절이네요.

 

입구에서부터 표충사 국민관광지 글자가 보이면서 가게들도 많고 차들도 북적북적합니다. 물론 주말이라 더 붐볐겠지만 일단 공간 자체가 사람들이 꽤 찾는 곳이라는 느낌입니다.

 

초입에 공영 주차장 안내판이 보이기에 저리 들어가야 하나 잠시 주저합니다. 차량을 코앞까지 못 들어오게 하는 사찰들이 종종 있으니까요. 

그래도 차량을 통제하는 분위기는 아니니 일단 계속 진행하는데, 소나무 숲이 퍽 울창합니다. 새빨간 단풍은 아니지만 노랗게 물든 나무들도 많이 보이고, 초입에 차를 세우고 걸어가는 게 더 좋았을 뻔했다는 후회를 불러일으키는 풍경입니다. 

 

주차장에서부터 주변을 둘러싼 풍광이 장난 아닙니다. 산세도 그렇거니와 단풍까지 어우러진 모습이 멋들어져서 눈길을 떼기 힘드네요.

맞아, 여기는 영남알프스라 불리는 산줄기에 속하는 곳이었지!

 

모든 사찰의 입구 일주문입니다. 

재악산표충사라 써있습니다. 일주문에 써진 재악산 말고 재약산이라고도 부르던데 어떻게 된 거지? 발음 문젠가?

 

 

 

일주문 옆에 천황산 코스 등산 안내도가 있네요. 

 

 

재악산, 재약산, 천황산

이름이 뒤섞인 것 같아서 찾아보니 원래는 재악산이라 했는데 일제가 재악산의 두 봉우리를 천황산과 재약산으로 바꿨다고 합니다. 얘네는 남의 나라 지명을 뭐 이리 열심히 바꿨나 몰라.

몇 년 전 밀양시에서 지명위원회를 열어 산 이름을 다시 재악산으로 돌리고 재약산으로 불리던 제2봉은 수미봉으로 부르기로 했다는군요.

그런데 안내판에는 여전히 천황과 재약산입니다. 

 

일주문을 지나 걷는 길가에 나무가 제법 울창한데 가을 분위기가 물씬 풍깁니다.

 

 

 

길옆에 제법 역사가 있어 보이는 건물이 서있습니다. 

영은각永恩閣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안을 들여다보니 나무로 만든 비들이 몇 개 서있습니다. 그러니까 영은각은 비각인 셈인데 안에 있는 비들이 돌로 만든 비석이 아니라 나무로 만들어진 게 특이합니다.

 

 

무슨 비들인지 궁금하지만 안내문이 없으니 알 수 없습니다. 비석, 아니 비목들에 영세불망비라는 글자가 있는 걸 보니 공덕비들 같습니다. 

 

 

 

표충사라 쓰인 누각이 보이면서 본격적으로 표충사 영역으로 들어섭니다. 이 누각 이름은 수충루라고 합니다.

 

 

사람들의 눈길이 잘 미치지 않지만 수충루 앞에 작은 전각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는 길가에 비탈에 같은 모양이 세워진 것도 본 것 같습니다. 크기로 보아 사람이 들어가며 실제 사용하는 전각은 아니고 상징적인 의미 같은데 안내문이 없어 정체를 알 수 없습니다. 

 

 

나중에 찾아보니 가람각이라고 합니다. 죽은 사람의 혼을 실은 가마가 경내로 들어가기 전에 잠깐 모셔 두는 곳이라고 합니다. 이곳에서 속세의 흔적을 씻고 간다는 의미라는군요. 순천 송광사에도 이런 전각이 있다는데, 몇 번 가본 곳인데도 도통 본 기억이 안 나네요. 아는 만큼 보인다, 그런 건가? 아무튼 흔히 있는 전각은 아닌 모양입니다.

 

 

수충루 아래를 지나 들어서니 너른 마당이 나오고 사천왕문이 멀찍이 계단 위에 있습니다. 왼쪽으로 보이는 건물은 유물관입니다.

 

 

 

유물관과 직각으로 서있는 건물은 표충사이고, 마주보고 있는 건물에는 표충서원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응, 전각 이름이 표충사? 그리고 서원이 왜 절 안에?

 

 

 

사실 표충사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표충사表忠寺와 표충사表忠祠

표충사表忠寺는 불교 사찰이고, 표충사表忠祠는 사당입니다. 

 

표충사表忠祠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켰던 서산대사(휴정, 청허), 사명대사, 영규대사(기허)를 기리는 사당입니다. 밀양 무안면에 있던 것을 헌종 때인 1839년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표충서원이라 사액을 받았고 절 이름도 표충사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표충사라는 절 이름은 사당인 표충사에서 비롯된 셈입니다.

 

사찰 표충사는 신라 진덕여왕 8년이자 태종무열왕 원년인 654년 원효대사로부터 시작됩니다. 원효대사가 지금의 극락암 자리에 작은 암자를 짓고 수행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침 대밭 속에서 오색영롱한 구름이 떠올랐고, 원효대사는 그 자리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죽림사竹林寺라 했습니다. 그 흔적이 지금도 절 뒤 대밭 속에 남아있다고 하네요.

이후 흥덕왕 때인 829년 병으로 고생하던 셋째 왕자가 이 절의 우물물을 마시고 낫자 신령스러운 우물이 있는 절이라고 해서 영정사靈井寺라고 이름을 고쳤다 합니다. 

조선시대 들어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1600년 중건하였고, 헌종 때 사당이 옮겨오면서 표충사가 된 것입니다.

 

유교 이념과 불교가 한데 뭉친 특이한 이름입니다. 

 

유물관을 들러보기로 합니다. 

표충사에는 사명대사와 관련된 유물이 16건 79점 있다고 합니다. 사명대사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 1604년 일본에 강화사절로 갈 때 그 호송 문제와 일본에 잡혀간 조선인 포로의 송환문제에 관해 다룬 문서,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비명을 새긴 목판 등과 함께 다라니경, 금강반야바라밀경 같은 불경도 있다네요. 

이 유물을 모두 전시해 놓은 것은 아니지만(사실 옛날 문서들은 우리가 봐도 뭐가 뭔지.....) 삼층석탑에서 나온 유물들, 사명대사가 썼던 발우, 청동은입사향완 등을 볼 수 있습니다. 

 

 

 

유물관 안내 데스크에 표충비각에 대한 안내문이 있습니다.

표충비는 임진왜란이나 한국전쟁처럼 나라에 큰일이 벌어지면 땀을 흘린다는 비석입니다. 아마 이곳에 와서 표충비를 찾는 분들이 많은 듯, 아예 안내문을 붙여 놓았네요. 하긴, 표충비라는 이름 때문에 당연히 표충사에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표충비가 한 시간 거리인 무안면 홍제사에 있다고 하기에 왜 비석만 따로 떨어져 있지? 했는데, 사당이 옮겨오기 전에 있던 곳이네요. 흠, 사당과 이 땀 흘리는 비가 함께 있는 것이 더 그럴 듯할 것 같긴 합니다. 

 

 

 

유물관에 있던 사명대사 영정

 

 

 

사명대사가 쓰셨다는 연잎 모양 발우입니다. 발우는 지금도 절에서 사용하는데, 연잎 모양으로 생긴 건 처음 보네요.

선조에게 하사받은 것으로 추정된다는데, 금박 장식까지 있는 걸 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청동은입사향완은 국보 7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향완에 있는 명문에 의하면 고려 명종 때인 1177년 제작되었고 원래 창녕 용흥사에 있던 것이라 합니다. 그것이 왜 표충사에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선조가 사명당 스님에게 하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는군요.

 

(이 사진은 문화재청에서 가져왔어요.)

 

유물관 밖에 있는 안내판에 이 향완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향로라고 써있습니다.

그럼 백제 대향로는 뭔데?

알고보니 향완 중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향을 피울 때 쓰는 도구를 통틀어 향로라 하고, 그 중에서 밥그릇 모양 몸체에 아래쪽에 나팔 모양으로 벌어진 원반형 받침이 있는 것을 향완이라고 합니다. 

 

유물관 밖에 있는 비사리구시입니다. 웬만큼 오래되고 큰 절에 가면 다 이 비사리구시가 있는데, 밥을 담던 통이라고 설명되어 있곤 합니다. 비사리구시가 크다는 것은 그만큼 절에서 밥을 먹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이니 이 비사리구시를 보면 절의 규모도 알 수 있다, 그런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 비사리구시는 밥을 담던 통이 아니라 종이 만들 때 닥나무를 담갔던 통이라고 합니다. 조선시대 사찰에서 나라에 바치던 공물 중 종이가 큰 비중을 차지했더랬죠.

그런데 절마다 왜 설명을 그렇게.....?

 

 

 

유물관 옆쪽에도 비사리구시가 또 있습니다. 

 

 

 

표충사表忠祠입니다. 아이들이 단체로 왔는지 시끌시끌하고 선생님은 아이들 말리느라 정신없고 그러네요^^

안에는 사명대사, 서산대사, 영규대사 세 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습니다.

 

 

유물관을 구경하고 표충사당에서 스님들 얼굴도 뵈었으니 이제 사천왕문을 지나 사찰 영역으로 들어섭니다.

 

맨 먼저 보이는 안내문. 1980년 전두환 군부에 의한 10.27법난 때 수난을 당한 사찰이라는 내용입니다.

10.27법난이란 계엄사령부에서 불교계를 정화한답시고 승려들을 강제로 연행하고 수사하고, 수배자들을 찾아낸다는 명분하에 전국의 사찰들을 뒤진 사건입니다.

광주항쟁이나 삼청교육대 같은 워낙 큰 일들이 있다 보니 사람들에게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는 사건입니다.

 

 

그 수모를 당하고도 전씨를 절에 모셔 주고 심지어 사면해 달라고 조계사 마당에서 떡하니 서명운동까지 하고....밸도 없나?

승려들이야 뭐 자비니 용서니 그런 말들 운운하겠지요. 

무조건 감싸고 나쁜 짓 한 거 묻어 두고 그런 게 부처님의 자비심인가? 그 자비심 우리 같은 중생들한테나 베풀어 주시지?

 

표충사 삼층석탑입니다. 

높이는 7.7미터, 통일신라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합니다. 

 

 

1995년 해체 보수 때 나온 유물들이 유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탑에서 특이하게 비석도 나왔다고 합니다.

홍치 4년(1491년) 2월에 재악산 영정사 탑이 많이 기울고 위태로워 보여서 스님들과 대중들이 시주하여 보수하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네요. 

 

한 단 높은 곳으로 올라서니 팔상전이 나타납니다. 팔상전은 부처님의 생애를 여덟 장면으로 만들어 모셔 놓은 전각입니다. 

팔상전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이겠군요.

 

 

 

표충사의 메인 건물, 모든 사찰의 중심 건물인 대웅전입니다. 표충사 대웅전은 대광전이란 이름이군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모셨습니다.

처음 지은 것은 신라 때지만 불타 버리고 지금 건물은 1929년 지은 것입니다. 

 

 

 

대광전과 팔상전 사이 뒤쪽으로 산신각이 있습니다. 산신각에서 기도하는 분들이 제법 있더군요.

 

 

 

산신각 벽에 그려진 호랑이. 제법 나이 드신 호랑이 같은데 그림이 정겹네요.

역시 호랑이는 살짝 엉성하고 서툴게 생겨줘야 제맛입니다^.^

 

 

 

산신각 옆 나무에 색색깔 천이 매달려 있습니다. 

절 안에 성황당도 아니고 뭔가 했더니 저마다 기원하는 바를 적어서 매달아 놓은 것입니다. 

 

 

 

대광전 맞은편 우화루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쉬고 있습니다. 

서까래 아래쪽에 스님들 영정이 줄줄이 걸려 있네요.

 

 

 

대광전 뜰에서 다시 한 단 더 올라가면 관음전과 명부전입니다.

 

 

 

관음전에는 당근 관세음보살이 모셔져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에는 원통전이라는 이름도 많이 씁니다.

 

 

 

명부전은 저승세계를 상징하는 공간입니다. 

사람이 죽어 저승에 갔을 때 생전의 행적을 심판한다는 열 분의 대왕님을 모신 곳이라 시왕전十王殿이라고 하는 사찰도 많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염라대왕이 바로 이 열 대왕님 중 한 분^^

주존불이 지장보살이라 지장전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절을 구경하며 배회하다 어쩌다 보니 듣게 된 옆에 있던 청년의 이야기.

아마도 지역 주민인 모양인데 말인즉슨 봄에는 어디 가고 여름에는 어디 가고 (앞에 두 곳은 흘려 들었어요) 가을에는 표충사 가는데 겨울에는 어딜 가지?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쪽 사람들에게는 표충사가 가을에 가면 좋은 명소로 알려져 있나 봅니다. 표충사 단풍이 유명한 듯?

하긴, 들어올 때 숲길도 그렇고 사찰의 규모도 그렇고 배경으로 보이는 산줄기도 그렇고 많이 찾아올 만합니다. 

절을 구경하는 사람들 중 등산복에 배낭 멘 분들이 많던데 영남 알프스가 억새로 유명해 산꾼들이 가을에 많이 찾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표충사 절도 절이지만 산에 가기 위해서라도 다시 한 번 가고 싶네요.

다음번에는 표충사를 지나 사자평까지 가보는 걸로!

아니, 표충사 배롱나무도 유명한 것 같던데 여름에 가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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