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밀양 아리랑을 떠올리는 분도 있을 테고 전도연이 주연한 영화 밀양을 떠올리는 분도 있을 텐데,
저는 영남루부터 떠오르곤 했습니다.
언제 가봐야지 하는 생각과 함께요.
그러다 2주 전에 밀양 갈 일이 생겨서 드디어 영남루에 올라가 보았습니다.
밀양 영남루는 우리나라 3대 누각 중 하나로 꼽힙니다.
나머지 두 누각은 진주 촉석루와 평양 부벽루
그렇다면 영영 3대 누각 중 나머지 하나는 볼 수 없다는 것인가?
진주 촉석루야 누구나 언제든 갈 수 있고, 평양 부벽루는 옛 그림으로 한번 봅니다.
김홍도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평안감사 향연도 중 부벽루 연회 장면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경치 좋은 곳에서는 먹고 마시자(응?)인 모양입니다.
부벽루를 언제 볼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지만 일단 눈앞의 영남루를 구경합니다.
영남루는 밀양시내를 흐르는 밀양강변에 바짝 붙어 있습니다.
영남루는 밀양도호부 객사에 속해 있던 건물인데, 지금은 영남루와 천진궁만 남아 있습니다.
진주 촉석루는 진주성 일대가 복원되어 있고 남원 광한루는 정원이 잘 가꾸어진 그래서 광한루원이라 불리는 것에 비해 영남루는 썰렁하다는 느낌까지 듭니다.
그래서인지 어째서인지 입장료를 안 받은 지도 꽤 된 것 같고요.
참, 영남루를 갈 때 입구에 주차장이 있는데 주차비는 30분 단위로 500원씩 올라갑니다.
5시간이 넘어가면 최대요금 5,000원만 받는군요.
영남루 주차장은 별로 크지 않아서 금세 꽉 차는 것 같은데,
조금 떨어진 밀양관아지 옆에 넓은 주차장이 있습니다.
주차장을 지나 약간 비탈길을 올라가면 먼저 박시춘 옛집이 보입니다.
이름이 퍽 익숙하고, 유명한 대중음악 작곡가인 건 알겠는데 어떤 노래를 만들었지 했는데 히트곡이 정말 많네요.
애수의 소야곡, 비 내리는 고모령, 신라의 달밤, 이별의 부산 정거장, 굳세어라 금순아, 전선야곡, 럭키 서울 등등 다 아는 노래들입니다.
1950~60년대 히트곡들이라는데, 도대체 왜, 어찌하여 나는 이 노래들을 다 아는 것인가?
집이 참 작습니다. 박시춘이 1913년생이니 그 시절에야 웬만하면 다 초가집 살았다지만 이 집은 유난히 작다 싶습니다. 그런데 백과에 소개된 것을 보면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유학을 간 것으로 나옵니다.
유명 작곡가였으니 말년에 가세가 기울어서 그리 된 것도 아닐 텐데 알 수 없군요.
박시춘 옛집과 영남루는 그야말로 옆집 수준의 거리에 있습니다.
영남루 안내도를 먼저 봅니다.
안내도를 보면 뭔가 많이 적혀 있지만 실제로는 단출합니다.
영남루 정도 명성이 있는 유적지면 주변에 뭔가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조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냥 누각만 덩그러니 서있네요.
누각에 바로 붙어서 다른 건물이 있습니다.
누각이란 게 본디 사방이 탁 트이도록 짓는 것인데 이렇게 바짝 붙어서 다른 건물을 짓기도 하나?
안내도를 보면 이 건물 이름은 능파각입니다.
영남루는 고려 공민왕 때인 1365년 밀양군수 김주(金湊)가 처음 지었습니다.
통일신라 때 있었던 영남사라는 절터에 지은 누각이라 영남루라고 했다 합니다.
그 후 여러 번 고치고 전쟁으로 불탔다가 다시 세우고 했는데, 지금 건물은 조선 헌종 10년(1844) 밀양부사 이인재가 새로 지은 것입니다.
영남루 서쪽에 침류각이라는 작은 건물이 있는데, 누각에서 침류각으로 이어지는 길이 층층으로 되어 있고 그에 따라 지붕도 층층입니다.
참 특이하다 싶으면서도 뭔가 익숙한 느낌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남원 광한루의 월랑이 이런 식입니다.
누각 정면에 현판이 세 개나 나란히 걸려 있습니다. 크기도 유달리 큽니다.
가운데에는 검은 바탕에 흰 글자로 영남루, 양쪽에는 흰 바탕에 검은 글자로 교남명루, 강좌웅부라 적혀 있습니다.
가운데 걸린 영남루 현판
왼쪽으로 보이는 현판은 교남명루
'교'는 높은 산을 뜻하는 글자네요. 여기서 말하는 높은 산 남쪽은 문경새재 남쪽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교남 = 영남이 되어 영남 지방의 이름난 누각이라는 뜻입니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현판은 강좌웅부
여기에서 강은 낙동강입니다.
낙동강 왼쪽에 있는 아름답고 큰 고을이라는 의미입니다.
영남루는 자유롭게 올라가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을 때는 한번에 올라가 있는 인원수를 제한한다는 말을 들은 것도 같은데 제가 갔을 때는 한산했던지라 여유있게 둘러보았습니다.
계단 앞에 관람 안내 배너와 음료수 보관대가 있습니다.
관람 예절이야 기본 상식만 생각하면 누구든 지킬 수 있는 정도의 내용입니다.
안쪽에 영남제일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진주 촉석루에는 영남제일형상이라 적혀 있던데, 그럼 영남에서 진짜 제일은 어느 쪽인 건가요?
누각 안쪽 윗부분에 있는 장식이 용 얼굴 같기도 하고, 귀면 같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축구 응원단 붉은 악마가 쓰는 이미지가 이 비슷하지 않았던가?
아마도 용을 조각한 걸 겁니다.
영남루 경내에는 단군과 역대 8왕조 시조의 위패를 모셔 놓은 천진궁이 있습니다.
원래는 효종 때 지어 위패를 모시던 요선관(혹은 공진관)의 부속 건물이었는데 경종 때인 1722년 공진관을 대신해 위패를 보관했다고 합니다.
영조 15년(1739)에 불탄 것을 10년 뒤 다시 지었고 헌종 10년(1844) 크게 수리했습니다.
1952년 단군봉안회가 생기면서 단군 및 삼국의 시조, 고려 태조의 위패를 모시면서 대덕전이라 했다가 957년에 천진궁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단군을 중앙에 모시고 왼쪽(동쪽)에 부여, 고구려, 가락, 고려의 시조를, 오른쪽(서쪽)에 신라, 백제, 발해, 조선의 시조를 모셨다 합니다.
위패를 모신 건물 옆에 단군 석상이 있는데, 동글동글 단순하게 조각된 모습이 어째 귀엽다는^^ 느낌이 듭니다.
일제강점기 때는 역대 시조의 위패를 땅에 묻어 버리고 이곳을 감옥으로 사용했다고 하는군요.
궁궐인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만들지를 않나, 거 하는 짓이 참 거시기하다고 한심해하려다 보니 남의 나라 정복(?)한 입장에서는 그런 짓을 하겠다 싶습니다.
어떻게든 별볼일 없는 나라라고 우겨야 했을 테니 정통성 말살이야 기본이었겠죠.(한숨 푹~~~)
천진궁은 앞에 네모난 기둥 모양 비석과 무인석들이 있는데 설명이 없으니 어떤 내력인지 알 수 없습니다.
비석에 쓰인 글자를 읽을 수 있으면 검색이라도 해보련만 제 한자 실력으로는 ○성대군○단입니다. 맨 위에는 무슨 글자? 군과 단 사이 글자는?
어찌어찌 검색해 보니 밀성대군지단, 밀양 박씨 시조인 밀성대군 박언침의 묘소입니다.
아니, 제단인가요?
1922년 우연히 이 곳에서 묘자리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라 밀성대군의 묘라고 판단해 단을 설치했다고 합니다.
천진궁과 관련된 석물인가 했더니 그건 아닌 셈입니다.
안내문 하나 설치해 주면 좋으련만 아쉽습니다.
영남루 입구에는 밀양아리랑 글자가 새겨진 커다란 표지석이 있는데, 영남루 아래쪽에 있는 아랑각과 연결지어 이곳에 설치한 것 같습니다.
밀양아리랑의 유래가 아랑 전설과 관련있다는 속설 때문일 텐데, 아랑사(아랑각) 이야기는 따로 포스팅하는 걸로.....
밀양아리랑이 새겨진 비석 옆에는 사명대사 동상으로 가는 계단이 있습니다.
사명대사가 밀양 무안면 고라리 출신이라 그런지 밀양에서는 곳곳에서 사명대사의 자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밀양 표충사야 이미 널리 알려진 곳이고, 생가터도 크게 단장한 것 같더군요.
살짝 가파른 계단을 오르다 보니 숲 사이로 동상이 보입니다.
사명대사 동상은 무봉사 주지로 있던 김대월 스님이 발의하고 밀양사람들이 성금을 모아 1971년 4월 건립했다 합니다.
무봉사는 영남루 바로 옆에 있습니다.
생각보다 짧게 영남루와 아랑각 구경을 마치고 조금 떨어진 밀양관아지도 둘러보았습니다.
지나가면서 얼핏 보기에도 그렇고 새로 복원해 놓은 티가 역력합니다.
밀양읍성이 축조될 당시에 만든 밀양관아는 100칸 넘는 규모였다는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모두 불타버렸습니다.
1599년 이영(李英) 부사가 영남루 경내에 초가집을 짓고 집무를 보기 시작했고, 광해군 때인 1611년 원유남(元裕男)부사가 원래 자리에 관아를 재건하였습니다.
그 이후 300년 넘게 관청으로 사용되었고 동헌, 정청, 매죽당, 북별실 내삼문 이외에도 연훈당, 전월당, 신당(新堂) 같은 부속 건물들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그 위치도 규모도 정확히 알 수 없다는군요.
현재 확인된 것은 이 정도인 모양입니다.
밀양관아 동헌의 이름은 근민헌, 백성을 위해 근면하게 일한다는 의미입니다.
동헌은 지방 관아에 있는 수령의 집무처로 고을마다 현판이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백성을 위하겠다, 열심히 일하겠다 그런 의미입니다.
옛 사람들은 건물에도 의미를 담아 이름을 붙여 주곤 했는데 관청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간혹 옛이야기 속 삽화에 보면 사또 나으리 앉아 있는 건물에 당당하게 東軒(동헌)이라는 현판 그려놓은 경우가 많은데, 이거 다 오류 내지 무성의입니다.
밀양관아는 고종 32년(1895년)에 지방관제가 개편되면서 군청으로 바뀌었다가 1927년에 밀양군청을 새로 지어 이전하였고 원래 관아 건물은 밀양읍사무소, 밀양시청, 내일동사무소 등으로 사용되었다 합니다.
현대 내일동사무소(내일동 행정복지센터)는 복원된 관아 바로 앞에 있습니다.
지금의 관아 건물을 복원한 것은 2010년입니다.
오래 폐허로 남아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다른 용도이긴 해도 계속 이용되던 공간인데도 옛 관아의 흔적을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은, 그동안 무심하게 건물을 보수하고 옮기고 새로 짓고 그랬던 탓이겠지요?
밀양관아터 앞에 3.13 밀양면민 만세운동을 기리는 비가 서있습니다.
의열단 이야기도 그렇고 일제강점기에 항일운동에이 꽤 거셌던 지역임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방방곡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월 장릉의 느릅나무 (0) | 2019.11.27 |
---|---|
밀양아리랑과 아랑각 전설이 무슨 상관? (0) | 2019.11.26 |
밀양 월연정과 용평터널 둘러보기 (0) | 2019.11.19 |
만어사, 댕댕 소리를 내는 신기한 돌들과 소원돌 (0) | 2019.11.18 |
밀양 표충사에서 만나는 사명대사의 자취 (2) | 2019.1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