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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방방곡곡

구례 윤문효공 신도비와 묘 앞의 석등, 석비 그리고 방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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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용방 인근을 지나다 보면 눈에 뜨이는 밤색 이정표가 있습니다.

'윤문효공신도비'

 

밤색 이정표는 대개 관광지나 유적지 같은 곳을 표시합니다.

 

이충무공 정도면 모를까,

시호만 보고는 누군지 알 수 없으니,

그 누군가 역사 속 인물이려니,

그래도 윤문효공신도비를 알리는 이정표가 여러 개 있는 걸 보니 나름 중요한 인물이려니 했지요.

 

그러다 우연히 이 신도비 사진을 보았는데,

오호라~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윤문효공신도비 실물을 보기 위해 찾아가 보았습니다. 

 

신도비는 죽은 사람의 생전의 행적을 기록해 묘 앞에 세우는 비석으로 

정2품 이상의 관직을 지낸 사람만 신도비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문효공 윤효손(1431~1503)은 

단종 원년인 1453년에 과거에 급제했고

황해도관찰사, 형조판서, 우참찬, 좌참찬 등을 두루 거쳤습니다.

성종때 <경국대전>과 <오례의주> 편찬에 참여하기도 했다는군요.

 

신도비를 찾아가면 방산서원을 먼저 만나게 됩니다. 

방산서원은 문효공 윤효손을 배향하기 위해 숙종 때인 1702년 처음 세웠습니다.

그후로 몇 분이 더 배향되었는데

고종 때 대대적인 서원 철폐령에 따라 철거되었습니다. 

 

1985년 서원을 다시 세웠는데

원래 위치인 용방면 용방리에서 이곳 이평리로 옮겨서 지었습니다. 

 

신성한 공간임을 나타내는 홍살문 너머 서원이 보입니다.

홍살문 위치가 좀 어색하다 싶은데.....

 

홍살문은 서원을 향해 걸어가는 길에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방산서원은 홍살문 앞쪽이 경작지라 그리 다닐 수 없고

사진을 찍은 위치인 옆쪽으로 해서 가야 합니다. 

현대에 와서 새로 짓다 보니 공간이 애매했던 모양입니다.

 

서원 뒤쪽에 무척 큰 나무가 눈에 확 들어옵니다.

크기도 크기려니와 수형도 퍽 멋집니다.

 

안내문을 보니 수종은 팽나무이고 2011년 현재 수령 506년으로 추정된다 합니다.

높이는 20m이고 가슴높이 둘레는 4.8m라는군요.

 

나무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지만 

여느 서원 향교와 마찬가지로 이곳도 문이 닫혀 있습니다ㅠㅠ

다니다 보면 향교나 서원이 문을 연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꽁꽁 닫혀 있는 방산서원의 외삼문

 

 

경앙문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데,

이 이름은 사당 같은 곳에서 주로 쓰는 것 아니었나?

 

'경앙'이란 덕망이나 인품을 사모하여 우러러본다는 뜻입니다.

하긴, 서원이란 곳이 성현들을 우러러 받들기 위한 공간이긴 하네요.

 

문이 닫혀 있어 담장 너머로 본 서원의 일부 모습

 

 

방산서원 바로 옆에 언덕이 이어지고, 이곳에 윤문효공의 묘가 있습니다.

석물을 갖춘 묘가 여러 기 보입니다.

문효공 집안의 선산인 듯합니다.

 

 

가장 아래쪽에 있는 묘의 주인공은 별다른 벼슬을 하지 못한 듯,

묘비에 생원 윤충의 묘라 되어 있습니다.

 

 

묘 앞에 있는 이 석물은 뭘까요?

등 위의 오목한 곳이 팔각인 걸로 보아 비석을 바치고 있던 귀부는 아닌 것 같고.....

 

 

아마도 윤문효공의 후손 중 한 분의 묘려니 하면서

위쪽에 있는 문효공의 묘와 신도비를 보러 갑니다. 

 

 

묘 앞에서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구만제가 한눈에 들어오는 풍광이 제법 멋집니다.

신도비 주변 탐방로 공사를 하느라고 석재가 흐트러져 있고 어수선합니다.

 

 

신도비나 승탑비 같은 비석은 보통 귀부(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에 세웁니다. 

그런데 윤문효공신도비는 특이하게도 귀부 아래 연꽃 모양 대좌와 네모난 기단이 있습니다. 

 

 

기단의 조각이 꽤 화려하고, 신도비가 더욱 웅장해 보입니다.

처음 보는 형식이라 그런가 어색한 느낌도 있습니다^^;;;;

 

거북의 비늘까지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고 

앞발로 연꽃 대좌를 꽉 쥐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고 보니 거북이 고개를 쳐들고 있는 경우도 별로 못 본 것 같습니다.

 

 

비석 위를 장식하는 이수 역시 조각이 화려합니다.

 

그런데 이수 위쪽의 둥근 장식은 뭘까요?

이수 위쪽에 이런 장식을 하던가?

생김새가 어째 불탑 꼭대기의 보주 같기도 합니다.

스님들의 탑비에서 이런 모양을 본 것 같기도 하고..........

 

조선 초기다 보니 이전 시기 승탑비의 양식이 남아 있는 건가? (갸우뚱)

 

문효공의 신도비는 돌아가시고 16년 지난 1519년 세워졌고 

비문은 신용개가 짓고, 신공제가 글씨를 썼다 합니다. 

 

신도비에 작은 글자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는데

우리 같은 사람들은 봐도 뭐..........ㅠㅠ

 

신도비 옆에 한글로 풀어 써놓은 안내문이 있지만

글자가 작고 너무 빽빽해서 읽을 엄두가 안 나네요^^

문효공 윤효손의 생전 업적과 학문, 인품, 자손 등에 관한 내용이라 합니다.

 

 

신도비 바로 위에 윤문효공의 묘가 있습니다.

신도비는 묘의 남동쪽 아래에 세운다는군요.

묘에는 담장까지 둘러놓았고 그 앞의 석등이 제법 큽니다.

 

 

네모난 석등 위에 지붕 모양 덮개를 올려놓았습니다.

석등 꼭대기에도 신도비처럼 둥근 장식이 있습니다.

 

묘 양옆을 지키는 문인석도 제법 규모가 있군요.

 

 

묘비 역시 흔히 보던 묘비들과 다른 모습입니다.

장식이 새겨진 높은 기단 위에 세우고 잘 조각된 머릿돌을 얹어놓았습니다.

정말 공을 들여서 묘를 조성했음을 알겠습니다.

 

 

문효공의 묘는 부인과의 합장묘입니다.

비석에 음각으로 새겨진 두 줄은

숭정대부행의정부좌참찬겸지춘추관사증시문효공윤효손지묘

정경부인연성박씨지묘

 

윤문효공신도비 내용에는 부인이 죽산 박씨라 되어 있던데

비석에는 연성 박씨라 되어 있네요.

안동 김씨 일부를 장동 김씨라 하는 것처럼 그런 경우인가요?

 

윤문효공과 박씨 부인의 합장묘 위쪽으로 묘 2기가 더 보입니다.

 

그 중 아래쪽 묘는 문효공 묘보다 아주 조금 규모가 작지만 비슷한 구성입니다.

묘비를 보니 윤처관이라는 분의 무덤이고 

부인의 묘는 위쪽에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윤처관은 윤효손의 아버지시군요.

 

 

묘비에 '증자헌대부이조판서행순창군사'라 되어 있는 걸 보니

생전에 순창군사를 지내시고 돌아가신 후 이조판서로 추증된 모양입니다.

 

윤처관 묘 앞의 문인석들.

아들 묘 앞의 문인석들은 눈을 크게 뜨고 있던데

아버지 묘 앞의 문인석들은 두 눈을 단정하게 감고 있네요^.^

 

 

윤처관의 묘 뒤쪽에서 바라본 모습

 

 

우리나라 사람들은 묘를 참 좋은 자리에 쓴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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