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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방방곡곡

남원 여원치 마애불상과 황산대첩비의 상관관계 (ft. 진포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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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원치 마애불상을 보러 갑니다.

여원치는 백두대간이 지나는 고개 중 한 곳으로 남원시 이백면과 운봉읍의 경계가 됩니다.

해발 477m니까 별로 높은 고개는 아닙니다.

그리고 운봉 자체가 고원이다 보니 다른 고개처럼 구비구비 높이 올라가는 느낌은 없고

큰길을 따라 가다보면 무심코 지나게 되네요^.^

 

이래저래 운봉을 여러 번 갔으면서도

여원치 마애불을 이번에야 마음 먹고 찾아가 보았습니다. 

 

오래 전 산행 하면서 여원치를 지난 이후, 여원치를 걸어본 건 얼마 만인지........(크흡)

 

여원치마애불상은 도로에서 안쪽으로 200m 정도 안쪽에 있습니다.

그런데 입구에 차를 세울 만한 자리가 마땅치 않습니다.

길옆으로 바짝 세운다면 승용차 한두 대 세울 수도 있겠지만.......

일단 여원재 정류장 근처 공터에 주차를 하고 걸어갑니다.

여원재 정류장에서 남원쪽, 서쪽으로 200m 정도 가면 여원치마애불 입구가 보입니다.

 

 

뒤돌아 보니 여원치 정상 안내판이 보입니다.

남원에서 운봉으로 향하는 방향에서 보이는 표지판입니다. 

그런데 높이가 480m로 되어 있네요. 

 

여원재? 여원치?

고개를 뜻하는 지명에 붙는 글자는 재, 치, 현, 령....또 뭐가 있지?

재는 우리말이고, 나머지 글자들은 한자어인데,

박달재, 우금치, 아현, 대관령 이런 식으로 특정 글자를 붙여서 부르는 경우가 많지만 

여원치, 여원재, 여원현처럼 한 장소에 여러 글자를 섞어 쓰기도 합니다.

한자에서는 고개에도 종류가 있어서 따로 구별을 하는 모양입니다.

 

 

마애불 가는 길이 잘 정비되어 있습니다.

바닥에 야자수 매트도 깔려 있고, 옆에는 벚나무들이 줄서 있네요.

 

 

길이 살짝 아래쪽으로 향하면서 저기 나무 사이로 공터가 있고 뭔가 보입니다.

 

 

여원치마애불상입니다.

 

 

살짝 도드라지게 양각으로 새긴 불상입니다.

불상 옆에 네모나게 파고 글을 새겨놓은 것이 보이고,

불상 앞에 보호각을 씌웠던 흔적이 보입니다.

 

 

여원치 마애불상 옆으로 제법 큰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서어나무 같습니다. 개서어나무던가?

 

 

신체 비례가 별로 정확치 않고, 머리가 몸에 비해 큽니다.

오른손을 들어 가슴께에 대고 있고, 왼손은 떨어져 나가고 없는데

원래 어떤 손모양이었을까요?

 

 

옆에 있는 안내판에는 가슴 아래 부분이 땅속에 묻혀 있다고 적혀 있던데,

가부좌를 튼 발 모양까지 보이는 걸 보면 아주 많이 묻힌 것 같지는 않은데.....

안내판을 설치한 후 땅을 더 파낸 걸까요?

 

불상의 높이는 2.5m이고 어깨  부분 폭은 1m 정도 되는 크기입니다.

 

 

여원치 마애불상은 고려시대 작품입니다.

불상 옆에 새겨놓은 글이 불상을 새긴 내력을 적은 것인데, 운봉현감 박귀진이 지었다 합니다.

 

 

고려말 이성계 장군이 왜구들을 토벌하러 운봉에 왔을 때

꿈에 어떤 노파가 나타나 이길 수 있는 날짜와 전략을 전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성계는 과연 전투에서 크게 승리를 거두었고

꿈속에 나타났던 노파를 위해 고갯마루 암벽에 불상을 새기고 사당을 지었습니다.

그 사당을 여원女院이라 불렀고, 이것이 고개 이름의 유래이기도 합니다.

 

정말로 이성계가 불상을 새기고 사당을 지어 주었을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런 이야기는 마애불에다 이성계라는 인물을 연결해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봐라, 나는 하늘이 돕는 사람이다, 라는 이성계 측 주장이거나

이성계의 대단한 업적을 흠모하는 백성들이 그렇게 믿고 싶었거나.....

 

여원치 마애불상 유래담에 나오는, 이성계가 운봉으로 출동했던 일은 역사에서 꽤 유명한 사건입니다.

바로 왜구들을 크게 토벌했던 황산대첩!

황산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후 이성계는 대표적인 군벌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성계 출세의 발판이 된 전투인 셈.

 

생각난 김에 3년 전 다녀왔던 황산대첩비지 사진을 주섬주섬 꺼내봅니다^^

 

황산대첩비는 여원치 마애불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황산대첩비를 보러 다녀올 때도 분명 여원재를 지나갔을 텐데

여원재의 마애불과 그 황산대첩비가 이런 식으로 연결된 줄은 몰랐었네요.

 

황산대첩은 1380년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이 지금의 운봉 일대에서 왜구들을 크게 무찌른 전투입니다.

이때 왜구들은 결정적 피해를 입었고, 이후로는 왜구의 침입이 거의 없어졌다고 합니다.

 

황산대첩은 1380년의 일이었는데 정작 기념비가 선 것은 조선 선조 때인 1577년이었습니다. 

그런데 황산대첩비는 1945년 1월 파괴되고 맙니다.

 

일제는 민족 문화 말살 정책을 펼치며 우리의 역사적 문화적 흔적을 참으로 열심히 파괴했는데

그 일환으로 황산대첩비를 부수었다는 말도 있고

일설에 의하면 남원경찰서 고등계형사들이 술김에 폭파시켰다는 말도 있다네요.

 

어떤 경우였건 간에 분명한 것은

1943년 11월 총독부에서 "반시국적인 고적을 관할 경찰들이 임으로 철거, 파괴해도 좋다"는 비밀문서를 각 지방에 내려보냈다는 겁니다. 

술김이었든 어쨌든 그래서 마음놓고 황산대첩비를 폭파했겠지요.

지네들 조상을 때려 부순 기념비니 싫기는 했겠다만......-..-

 

어쨌든 황산대첩비는 파괴되어 버렸다가 1957년 다시 세웠고, 지금 비각 안에 있는 것은 이 비석입니다.

 

황산대첩비가 제법 규모 있는 보호각 안에 있습니다.

 

 

비석을 받치고 있는 귀부는 부서졌던 것을 어찌어찌 짜맞추어 복원한 모양입니다.

 

 

비석은 부서지고 글자를 죄 긁어놓아 내용을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부서진 원래 비석은 옆에 따로 파비각을 만들어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황산대첩 이야기를 들으면서 드는 의문점 하나가

왜구들은 배 타고 일본에서 건너온 자들이고 주로 서남해안 지역에서 약탈질을 했던 걸로 아는데

어떻게 지리산 자락까지, 내륙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거지? 하는 거였습니다.

 

알고 보니 황산대첩은 같은 해 있었던 최무선의 진포대첩과 연결됩니다.

화약무기를 만들기 위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던 최무선이 드디어 제조에 성공해 내고

그 화약을 처음 사용해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전투가 진포대첩입니다.

진포는 지금의 서천, 군산 이쪽이라고 합니다.

진포에서 크게 타격을 입은 왜구들이 도망치면서 내륙으로까지 들어왔고 운봉에까지 온 겁니다. 

그 왜구들을 완전 박살낸 것이 이성계의 황산대첩이고요. 

 

화약 무기를 만들기 위해 애쓰던 최무선 이야기도 익히 들었고

이성계가 고려 말 황산대첩을 통해 거물로 부상한 것도 배웠는데

따로 따로 알고 있었지

이렇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한참 뒤에 알았네요^^

 

황산대첩비와 조금 떨어진 곳에 바위에다 보호각을 씌우고 어휘각이란 현판을 달아 놓은 것이 보입니다. 

임금 어자를 쓴 걸 보면 어느 임금님이 내린 글인가 싶은데........

 

 

이성계가 황산대첩을 치른 다음해 다시 이곳을 찾았는데

그때의 승리를 기리고자 함께 전투에 참여했던 장수들의 이름을 새긴 거라고 합니다. 

글자를 새길 때야 고려의 무장이었지만 훗날 조선의 첫 임금이 되었으니 어휘^^

 

일제는 이 바위도 글자를 알아볼 수 없게 정으로 쪼아버렸다 합니다.

그런다고 역사적 사실이 없던 게 되겠냐만.......

 

운봉을 여행한다면,

황산대첩비와 여원치 마애불상을 함께 엮어서 찾아보면 스토리가 있는 여행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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