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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실

'난중일기'와 '이충무공전서'와 '임진장초'와 국보 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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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에 대해 설명하면서 저서로 <난중일기>와 <이충무공전서>를 언급한 사전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저서라면서 '전서'를 언급하는 것도 그렇지만,

난중일기와 이충무공전서를 별개인 양 나열해 놓은 걸 보니 이게 뭔 소리인가 싶네요.

 

'난중일기'는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이순신李舜臣(1545∼1598) 장군이 임진왜란 중 쓴 일기입니다.

난중일기亂中日記라는 제목 자체가 난리중에 쓴 일기,

즉 전쟁을 치르며 쓴 일기라는 뜻입니다.

본디 일기란 지극히 개인적인 기록이지만,

전쟁을 하는 중에 한 나라의 병사들을 통솔하는 장군이고 보니 그 내용이 사적일 수만은 없을 터이고,

당시 전쟁의 상황을 알 수 있는 내용이 많아 소중한 역사자료가 되기도 합니다.

 

광화문의 이순신장군 동상

 

당연한 얘기겠지만, 본래 이 일기에는 이름이 붙어 있지 않았습니다.

일기를 쓰면서 따로 제목을 붙이는 경우는 없으니까요.

충무공이 남긴 일기에 '난중일기'라는 제목이 붙은 것은 정조 19년(1795년)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를 편찬하면서입니다.

 

이충무공전서 편찬에는 유득공, 이만수 등이 참여했고, 14권 8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전서 중 권5에서 권8까지 일기를 수록하면서 이것을 편의상 ‘난중일기’라 했고,

이것이 책 제목처럼 널리 쓰이게 된 것입니다.

 

전서全書란 어떤 사람의 저작을 한데 모은 것입니다.

그러니 <이충무공전서>를 발간할 때 당연히 이순신 장군이 남긴 친필 기록들을 저본으로 삼았는데,

그 친필 기록들은 지금 국보 7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국보 76호의 정식 명칭은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李舜臣 亂中日記 및 書簡帖 壬辰狀草)'입니다.

 

난중일기는 이순신의 친필 일기로 모두 7권입니다.

각 권은 연도별로 묶은 것이고, 그 해의 간지를 따서 이름을 붙였습니다.

 

일기별로 기록 시기와 분량을 보면 이렇습니다.

 

제1권 임진일기 - 선조 25년(1592) 5월 1일~선조 26년(1593) 3월 - 27매

제2권 계사일기 - 선조 26년(1593) 5월 1일~9월 15일 - 30매

제3권 갑오일기 - 선조 27년(1594) 1월 1일~7월 28일 - 52매

제4권 병신일기 - 선조 29년(1596) 1월 1일~10월 11일 - 41매

제5권 정유일기 - 선조 30년(1597) 4월 1일~10월 8일 - 27매

제6권 정유일기속 - 선조 30년(1597) 8월 4일~선조 31년(1598) 1월 4일 - 20매

제7권 무술일기 - 선조 31년(1598) 9월 15일~10월 7일 - 8매

 

제6권 정유일기속에 있는 8월 4일부터 10월 8일까지의 일기는 5권에 있는 일기와 날짜가 중복됩니다.

처음에 급한 대로 일기를 썼다가 다시 자세한 내용으로 보충한 모양입니다.

 

난중일기-임진일기, 병신일기 [문화재청]

 

서간첩은 이순신이 쓴 편지들입니다.

 

임진장초壬辰狀草는 임진왜란 중 조정에 올린 장계의 초본을 말합니다.

장계란 임무 수행중인 관리가 왕에게 올리는 보고서를 말합니다.

전쟁 중 올린 장계이니 왜군의 정황이나 전투 결과, 진중의 경비 및 준비 상황 등이 상세하게 적혀 있습니다.

임진왜란의 전개 과정을 이해하는 데 더없이 요긴한 사료인 겁니다.

 

임진장초 [문화재청]

 

 

 

이충무공전서는 이 일기와 편지들과 장계들(임진장초)을 원고 삼아 편찬한 것입니다.

또 충무공에 대한 여러 문헌의 글들도 뽑아서 실어 놓았습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거북선 그림이 실려 있다는 것입니다.

거북선을 연구하는 분들이 많이 인용하는 그림이 바로 이 전서에 실린 것입니다.

 

이충무공전서에 실린 전라좌수영 거북선
한산도의 거북선등대

 

그런데 이충무공전서에 실린 일기는 친필 원고보다 내용이 많이 생략되었습니다.

급하게 흘려 쓴 일기를 정자로 베껴서 판각할 때 걸러진 듯합니다.

또, 전서에 있는 내용 중 남아 있는 친필 원고에 없는 것도 있는데, 아마도 훗날 친필 원고 일부를 잃어버린 모양입니다.

1592년 정월 1일부터 4월 22일까지, 1595년 한 해, 1598년 10월 8일부터 12일까지의 내용 등이 전서에는 있지만 친필 원고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전서는 편찬 뒤 활자로 인쇄해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에 보관할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았는데,

정조의 각별한 관심을 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정조실록 19년(1795 을묘) 9월 14일

'충무공이순신전서(忠武公李舜臣全書)'를 발간하였다.

이에 앞서 내각에 명하여 이순신의 옛날 행적 및 유고를 모아 한 책으로 만들도록 명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편찬해 올리니, 하교하기를,

"이번 일은 충의를 드높이고 공로에 보답하며 무용(武勇)을 드러내고 공적을 표창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편집할 때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관심을 표명했었으니 이제 인쇄할 때에 와서도 역시 특별한 조치가 있어야 마땅하다. 이제 내탕(內帑)의 돈 5백 민(緡)과 어영(御營)의 돈 5백 민을 내려주어 책을 인쇄하는 비용을 보조하도록 하라."

 

이충무공전서가 편찬된 것이 정조 19년(1795년)이니 충무공이 전사하고 200년 가까이 된 시점입니다.

이충무공전서 간행은 정조 때 시행된 이충무공 추숭 사업의 일환이었습니다.

정조는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기 전인 1793년에 이순신을 영의정으로 추증하는 한편,

1794년에는 직접 이순신의 신도비명을 짓고,

이듬해에는 이 비문을 탁본해 사고에 보관하기도 했습니다.

 

정조실록 19년(1795 을묘) 5월 11일

임금이 지은 고 충신 이순신의 상충 정무비 인본을 나누어 주었다

이에 앞서 상이 충무공 이순신의 탁월한 공적과 충절을 생각하여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친히 지었다. 그리고 송나라 부필(富弼)의 묘비 제목을 전자(篆字)로 썼던 예를 본따 그 비의 제목을 전자로 써서 ‘상충정무지비(尙忠旌武之碑)’라고 하고, 내각에 명하여 안진경(顔眞卿)의 가묘(家廟)의 비에서 글자를 모아 쓰게 하였다. 그리고는 호남의 도백 이형원에게 명하여 돌을 캐내어 그 묘에 세우게 하였는데, 갑인년에 그 일이 마무리되었다. 이 때에 이르러 내각이 탑본을 바치자 다섯 군데의 사고 및 관각과 태학에 나누어 보관토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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