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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실

두문불출杜門不出은 고려 멸망과 함께 생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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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만 들어박혀 일절 밖에 나가지 않는 것을 뜻하는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은 고려 멸망과 관련해 생겨난 말입니다. 물론, 역사적 배경 빼고 글자만 그대로 풀어도 이런 뜻이 되기는 합니다.

 

1392년 7월 이성계가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건국하자 고려의 관리와 학자들 중에는 이 새 왕조에 합류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끝내 자신이 고려인임을 부정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신념을 목숨처럼 지켰던 것입니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신하들을 회유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써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개성 경덕궁에서 과거를 실시했지만 아무도 시험장에 나타나지 않고 그 앞의 고개를 그냥 넘어가 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고개를 부조현不朝峴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이들은 새 조정에 참여하라는 이성계의 권유와 회유를 피하기 위해 하나 둘 개성을 떠났는데, 개성 동남쪽 고개에 올라서서는 조정에 나아갈 때 착용했던 의관을 벗어 나뭇가지에 벗어놓고 평복으로 갈아입고 삿갓을 썼다 합니다. 그래서 이 고개를 관을 걸어놓았다는 뜻의 괘관현掛冠峴이라 합니다. 

 

이들은 개풍군 광덕면 서쪽에 있는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은거하며 일절 세상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이 생겨난 내력입니다.

 

그런데 보통 두문동이라는 지명 때문에 두문불출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하지만, 杜가 막는다는 뜻의 글자인 걸 보면, 어쩌면 두문동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 일 이후에 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봅니다. 

 

개성의 두문동비(이미지 출처 : 신동아)

 

이렇게 두문동에 은거했던 사람들을 일컬어 보통 두문동 72현이라고 합니다. 72이라는 숫자가 있지만 정확히 이름이 전해지는 사람도 몇 명 되지 않고, 인원도 딱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72현이라는 말은 조선 영정조 때 이 분들에 대한 추모 작업이 이루어질 때 굳어진 말이라고 합니다.

 

고려의 신하임을 다짐하는 72현이 두문불출하자 이성계는 이들을 밖으로 나오게 하려고 두문동에 불을 질렀다고 합니다. 불길을 피해 나올 거라 생각한 것이지요. 하지만 이들은 끝내 불 속에서 죽는 길을 택했다는군요.

 

이분들은 조선 초기에는 왕조의 반대세력으로 미움을 받았겠지만 훗날 충신으로 재평가받게 됩니다.

 

영조는 1740년(영조 16년) 부조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비석을 세워 주었고, 1751년에는 두문동에도 비를 세우게 됩니다. 정조는 그 후손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추모의 뜻으로 개성 성균관에 표절사를 세워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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