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6대 임금 단종은 적장자 승계라는 정통성에도 불구하고 숙부인 수양대군에 의해 폐위되는 비극을 겪습니다.
단종은 여러 모로 불리했습니다. 우선 아버지 문종이 너무 일찍 승하하는 바람에 12세라는 어린 나이에 즉위했습니다. 사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걸로 치면 성종은 13세에, 숙종은 14세에, 순조는 11세에 즉위했으니 나이가 문제는 아니었을 겁니다. 문제는 어린 왕을 제대로 후견해 줄 왕실의 어른이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큰 것은 숙부인 수양대군의 야심이 너무 컸다는 것이고요.
결국 단종은 숙부에 의해 폐위돼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갔고, 노산군으로 강봉된 채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세조(수양대군)는 단종의 시신조차 제대로 거두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누구든지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는 자는 삼족을 멸하겠다는 서슬퍼런 명을 내린 것입니다.
다행히 영월 호장 엄흥도가 목숨을 걸고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몰래 묻어주었습니다.
노산군으로 취급되던 단종은 훗날 숙종대에 가서 복위되었고 엄흥도는 공조참의에 증직(죽은 후에 벼슬을 받는 일)되었습니다. 영조 때는 정문을 받았고 다시 공조판서에 증직되었지요. 또, 사육신과 함께 영월의 창절사에 배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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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단종의 죽음과 관련해 또 한 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단종의 묘가 방치되어 있을 때 박충원이 수습해 주었다는 내용인데, 약간 전설 따라 삼천리 분위기를 풍기는 이야기입니다.
단종이 돌아가신 후 영월에는 군수가 부임했다 하면 첫날을 못 넘기고 비명횡사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같은 일이 반복되자 아무도 영월군수로 가려 하지 않았고, 임명을 받으면 이런저런 핑계로 사직해 버리곤 했습니다.
"영월군수를 제수받고도 뚜렷한 이유없이 부임하지 않으면 삼족을 멸할 것이야!"
임금이 으름장을 놓기는 했지만 부임하는 족족 죽어나가니 마냥 밀어 붙일 수만은 없는 일이었습니다.
수령 자리는 비어 있고, 그러니 업무가 제대로 처리되지 못했고, 백성들은 토호들에게 시달림을 받았습니다. 민심이 흉흉해질 수밖에요.
그러던 중 박충원이라는 사람이 영월군수로 가겠다고 자청하고 나섰습니다. 영월군수를 무사히 수행하고 나면 자신은 물론 가문의 명예가 되리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영월에 부임한 첫날 박충원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불을 환하게 밝힌 채 자리를 지켰습니다.
'분명 무슨 사연이 있을 것이야. 내가 기필코 밝혀내고 말리라.'
야심한 시각이 되자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모골이 송연한 박충원 앞에 귀신인 듯한 형상이 나타났습니다.
"아!"
박충원은 바로 엎드리며 예를 갖추었습니다. 단박에 단종임을 알아본 것입니다.
단종은 몹시 지치고 힘들어 보였습니다.
"지금 내가 묻혀 있는 곳이 몹시 불편하오. 그래서 자리를 옮겨달라고 부탁하려 했던 것인데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군수들이 놀라서 쓰러져 버리는구려."
단종은 과연 소름끼치는 귀신으로 오인받을 만한 모습이었습니다. 박충원은 바닥에 엎드리며 목놓아 통곡했습니다. 그러다 잠에서 깨어났지요.
"내가 꿈을 꾼 것인가, 실제로 다녀가신 것인가?"
박충원은 날이 밝는 즉시 단종이 묻힌 곳을 찾아 나섰는데, 그 무덤은 풀이 덮여 황폐하고 흔적을 찾기 어려운 모습이었습니다. 박충원은 봉분을 갖추어 이장한 뒤 정중하게 제를 지내 주었다고 합니다.
억울함을 호소하러 나타났는데 수령들이 지레 겁을 먹고 죽어 버리고, 그러다 대담한 사람이 그 자리에 지원해서 주인공을 만나 원한을 풀어 주는 스토리.
어째 많이 들어본 플롯입니다. 영남루의 아랑 아씨 이야기도, 장화홍련 이야기도 이런 구성입니다.
그런데 그냥 전설 따라 삼천리라고 치부하기에는 애매한 것이, 박충원은 실제로 영월군수를 지낸 적이 있습니다. 영월에 있는 단종의 능인 장릉 경내에는 박충원을 기리는 비도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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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진짜 이야기네! 하고 싶지만 이게 또 역사적 사실과 다릅니다.
박충원의 생몰연대는 1507~1581년이고 영월군수를 지낸 것은 1541~1545년입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는 중종 11년(1516) 노산군 묘를 찾아냈고 그해 12월 10일에 치제했다는 내용과 함께 무덤의 위치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중종실록 11년 12월 10일
우승지 신상을 보내 노산군의 묘에 치제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 중략 ] 또 논한다. 신상(申鏛)이 와서 복명하고, 김안국과 함께 말하다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며 "묘는 영월군 서쪽 5리 길 곁에 있는데 높이가 겨우 두 자쯤 되고, 여러 무덤이 곁에 총총했으나 고을 사람들이 군왕의 묘라 부르므로 비록 어린이들이라도 식별할 수 있었고, 사람들 말이 '당초 돌아갔을 때 온 고을이 황급하였는데, 고을 아전 엄흥도란 사람이 찾아가 곡하고 관을 갖추어 장사했다.' 하며, 고을 사람들이 지금도 애상스럽게 여긴다." 하였다.
그럼 이때 묘를 찾아냈지만 시간이 흘러 방치되었나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한두 해만 벌초를 못 가도 무덤에 풀이 우거지고 어수선해지곤 하니까요.
하지만 중종실록 35년(1540) 8월 4일에도 승지를 보내 제를 지내는 일에 대해 언급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중종실록 35년 8월 4일
승지를 보내 노산군과 연산군의 묘에 사제하려 한다고 전교하다
"승지를 보내 노산군과 연산군의 묘에 사제(賜祭)하려고 한다. 이는 요즘 하지 않던 일이니 대신에게 수의하도록 하라."
쫓겨난 왕이지만 제사는 지내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연산군에 대해서는 "다만 연산군은 종사에 죄를 얻었고 일찍이 많은 성은을 입었으니 관원을 보내 치제하지는 마소서." 하는 의견이 있었고 왕이 이에 따랐다 합니다.
조정에서 노산군 묘에 대한 사제를 의논한 것은 중종 35년으로 박충원이 영월군수로 부임하기 바로 전해입니다.
비록 노산군에게 왕이 제를 하사하는[사제賜祭] 형식이기는 해도 조정에서 제사를 지내주었는데 그 사이에 무덤이 방치되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겠네요.
그래도 단종의 묘와 관련해 박충원 이야기가 전하고 그 공로로 비까지 세워 준 걸 보면 뭔가 하긴 한 것 같은데....상상력을 발휘해 보자면, 조정에서 제사도 지내 주는 상황이니 노산군(단종) 묘를 돌보는 일이 세조가 왕이던 시절처럼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터이고 박충원이 특히 정성스럽게 묘를 돌본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요.
혹은 죽은 뒤에도 왕위를 회복하지 못하고 여전히 노산군이라 불리는 단종의 처지를 안타까워한 민심이 보태져서 만들어진 이야기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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