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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실

광화문이라는 이름은 언제부터 사용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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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뒤적이다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뉴스를 보니 광화문 현판에 금이 갔다는 뉴스가 뜹니다.

광화문 현판은 2010년에도 복원 3개월 만에 금이 가서 수리를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또 다시 1미터 정도 길게 금이 갔다는군요. 그런데 이 뉴스에 달린 댓글을 보니 정부 및 정권을 비난하는 글이 주루룩 달려 있습니다. 물론 문화재 관리가 부실한 건 욕먹어 마땅한 일이지만 이 일에 대한 비난치곤 과하다 싶은데, 그도 그럴 것이

숭례문 부실 복원 문제를 보며 이 나라의 문화재 관리 실태에 한숨을 쉬고, 세월호 참사를 보며 이 나라의 총체적인 관리 부실에 분노했는데....

정말이지 이 나라는 이런 사소한(하지만 물론 사소하지 않은) 문화재 관리조차 엉망인가 싶어 분노가 더 커지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이 뉴스를 보다가 광화문이라는 이름을 언제부터 썼더라 하는 생각이 들어 찾아보았는데, 단순한 사실확인 같은 이 일이 또 골치가 아픕니다. 

 

조선이 건국되고 한양 천도 후 경복궁을 새로 지었을 때 정도전은 경복궁이라는 궁 이름과 더불어 주요 전각들의 이름을 지었는데 이때까지도 광화문이라는 이름이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찾아보니 정도전은 경복궁 남문의 이름을 정문正門이라 붙였고, 그 내력이 정도전 문집인 <삼봉집>에 실려 있습니다.

 

삼봉집三峰集 권4 기記

 

정문正門   천자와 제후가 비록 그 형세는 다르지만 남면(南面)하고서 정치를 하는 것은, 모두가 정(正)으로써 근본을 하니 대개 그 이치는 하나인 것이다. 고전을 상고하면 천자의 문을 단문(端門)이라 하는데, 그 단(端)이 바로 정(正)인 것이다. 이제 오문(午門)을 지칭하여 정문(正門)이라고 했다. 명령과 정교가 반드시 이 문을 통해 나갈 때 살펴서 신실한 뒤에 나가게 하면, 참설(讒說)이 행하지 못하고 거짓이 의탁할 곳이 없을 것이며, 복주(覆奏)하고 복역(復逆 임금에게 상주하는 일과 명령을 받드는 일)이 반드시 이 문을 통해 들어오니, 살펴서 신실한 뒤에 들어오게 하면 사벽한 것이 들어올 수 없을 것이고 공적[功緖]도 상고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문을 닫아 이언(異言)하는 기사(奇邪)한 백성을 끊고, 이 문을 열어 사방의 어진 이를 오게 하는 것은 이 모두가 정(正)의 큰 것인 것이다.

 

여기에서 오문午門은 남문의 의미입니다. 12지로 방위를 나타내면 午가 정남향이 됩니다.

 

 

그렇다면 광화문이라는 이름을 언제부터 썼을까?

 

역사적 사실인데도 이상하게 설명이 조금씩 다른데, 세종 때 집현전 학자들이 붙인 이름이라는 설명이 많이 보입니다.

 

네이버 지식사전을 찾아보니 한국관광공사에서 붙여 놓은 설명에도, 박문각에서 나온 시사상식사전에서 발췌했다는 내용에도 세종 때 광화문으로 이름을 바꿨다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두 설명에 나오는 연도가 서로 다릅니다. 이러면 일단 믿음이 확 가십니다ㅜㅜ''

 

책과함께 출판사에서 나온 <경복궁에 대해 알아야할 모든 것>이라는 책을 뒤져보니 세종의 부탁을 받은 집현전 학사들이 광화문으로 이름 붙였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경복궁에 대해 연구를 하고 쓴 책일 텐데 이걸 믿어야 하나? 하면서도 뭔가 찜찜합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펴낸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설명에는 태조4년(1395년) 경복궁을 창건하고 기본 적각들을 갖춘 뒤 1399년에 그 둘레에 궁성을 쌓고 동서남쪽에 성문을 세워 동문을 건춘문, 서문을 영추문 남문을 광화문(光化門)이라 했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뭐, 일단은 이 설명을 신뢰해 볼까 하다가.....

 

혹시 조선왕조실록에는 광화문이라는 이름이 언제부터 나오나 찾아보았더니

세종 때 이름을 바꾼 거라는 숱한 설명과 달리, 그리고 그나마 믿음이 갔던 한국학중앙연구원의 1399년 설명과 달리 태조 4년(1395년) 기사에 이미 광화문이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태조 8권, 4년(1395 을해 / 명 홍무(洪武) 28년) 9월 29일(경신) 6번째기사 

後築宮城, 東門曰建春, 西曰迎秋, 南曰光化門。 樓三間有上下層, 樓上懸鍾鼓, 以限晨夕警中嚴。 門南左右, 分列議政府、三軍府、六曹、司憲府等各司公廨

뒤에 궁성을 쌓고 동문은 건춘문이라 하고, 서문은 영추문이라 하며, 남문은 광화문(光化門)이라 했는데, 다락[樓] 3간이 상·하층이 있고, 다락 위에 종과 북을 달아서, 새벽과 저녁을 알리게 하고 중엄(中嚴)을 경계했으며, 문 남쪽 좌우에는 의정부, 삼군부, 육조, 사헌부 등의 각사 공청이 벌여 있었다.

 

 

이렇게 조선왕조실록에 광화문이라는 이름이 멀쩡하게 뜨는데 왜 책마다 사전마다 다 설명이 다른 걸까요?

게다가 세종 때 집현전 학사들이 광화문이라는 이름을 지었다는 이야기는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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