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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이야기

선조에게 직언을 서슴지않은 김성일이라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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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선조(재위 1567~1608)가 경연 자리에서 자신을 이전의 어떤 제왕과 비교할 만한지 물었다고 합니다. 사실, 왕이 대놓고 이런 질문을 하면 신하더러 어떤 대답을 하라는 건지 뻔한 거 아닌가요?

인조와 더불어 역대 최악의 군주로 꼽혀도 할말이 없을 찌질한 선조지만, 그래도 내심 좋은 평가를 받고 싶었나  봅니다.

역시나 한 대신이 선조가 원하는 대답을 합니다.

"요순 시대를 이끈 제왕과 견줄만합니다."

요순은 역사상 최고의 태평성대를 이루었다는 중국 고대의 요임금과 순임금입니다. 원, 아무리 입에 발린 소리라지만 지하에 누웠던 요임금과 순임금이 기가 막혀 콧방귀를 뀌겠네요.

그런데 사간원 정언이었던 학봉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요순도 될 수 있고 걸주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는 말입니다.   

"전하께서는 명석함을 타고나셨으니 요순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덕에 너무 치우쳐 신하의 간언을 따르지 않으면 망한 걸주의 위험도 있는 것입니다."

걸주는 중국 고대 하나라의 걸왕과 은나라의 주왕을 일컫는 말로 극악한 폭군의 대명사로 불립니다.  선조가 버럭할 만한 대답입니다. 이에, 서애 유성룡이 부랴부랴 사태를 수습합니다.

"요순은 군주를 인도하는 말이고 걸주는 군주를 경계하는 말이니, 두 사람 모두의 말이 맞습니다."

 

동구릉 중 선조의 무덤인 목릉

 

이 이야기는 야사에 전하는 것으로, 학봉 김성일의 꼿꼿한 성격을 보여 줍니다. 

요순 운운한 앞부분은 칭찬을 슬쩍 하는 것도 같지만 형식적인 말일 테고, 결론은 왕 마음대로 정치를 펴지 말고 신하들의 말을 잘 받아들여 선정을 펴달라는 것일 테지요. 그런데, 이 말이 참 거시기합니다. 당시 조정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당쟁이 퍽 심했습니다. 심지어 임진왜란 중에 피난 가서까지 사사건건 싸우는 바람에 선조가 화를 냈을 정도라고 합니다. 

임금 앞에서 바른 소리를 했다는 김성일이지만 임진왜란이 나기 불과 2년 전인 1590년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후 "왜국이 침략할 것 같지는 않다."는 그릇된 보고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서인인 황윤길이 "왜국이 반드시 침략할 것."이라고 보고하자 동인인 김성일은 그 반대의 보고를 한 것입니다. 

유성룡이 같이 일본을 보고 왔는데 왜 판단이 다르냐면서 만일 전란이 나면 어떻게 하려느냐고 묻자 김성일은 이렇게 대답했다 합니다.

"황윤길의 말이 너무 심각하여 경향의 사람을이 모두 놀라고 당황할 것 같아 이를 해명했을 따름입니다."

과연 그럴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만일 일본이 쳐들어온다면 그게 얼마나 심각한 일인데 사람들 놀라지 말라고 그리 대답한단 말입니까. 그리고 진짜로 그런 의도였다면 나중에라도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언급하며 대비책을 논의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임금 면전에서 직언을 서슴지 않는 대쪽 같은 성품에다가 자식들에게 "개인적인 욕심의 관계를 끊어 의리를 취하라"고 가르쳤던 분이라는데 당쟁의 와중에서는 다 똑같은 사람이 되는 걸까요? 좀 씁쓸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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