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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방방곡곡

사천 봉명산 다솔사의 적멸보궁, 대양루, 안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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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가볍게 산행할 만한 곳이 없을까 궁리하다 사천 봉명산이 떠올랐습니다.

도솔사에 한 번 가봐야지 했던 터라 겸사겸사 길을 나섰지요.

 

아침을 생략하고 집을 나섰는데 

절 앞에 식당이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어 곤명면에서 식사를 해결하기로 합니다.

곤명면에서 두리번거리다 보니 식당은 꽤 여러 곳 있는데 문제는 점심 때부터 영업을 한다는 것ㅠㅠ

여러 집을 헤매다 다행히 아침식사를 하는 곳이 있어 식사를 해결했습니다.

맛은.....음.....끼니를 해결했으니 다행인 걸로^^;;;;;

 

신산마을을 지나 다솔사 방향으로 우회전해서 가다 보니 음식점이 꽤 여러 곳 보입니다.

다솔사가 아주 작은 절은 아닌가 봅니다.

 

조금 더 가니 한적한 길에 뜬금없이 카페가 보인다 싶더니 주차장이 있습니다.

비탈진 곳에 두 단으로 된 주차장인데 아래쪽은 대형버스 주차장이고 윗쪽이 소형 주차장입니다.

 

대형버스 주차장이 있다는 것은?

이곳을 찾는 사람이 꽤 많다는 의미겠지요?

 

절앞에도 주차장이 있다길래 일단 올라가 보았습니다.

 

소나무가 잔뜩 우거진 길이 제법 운치가 있습니다.

이런 길이라도 차들이 다니는 옆으로 걸으려면 살짝 짜증이 날 수 있는데

다솔사 입구는 걷는 길을 찻길과 따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냥 걸어올 걸!

잠깐 후회 아닌 후회를 해보지만 때는 늦으리~~♪

 

절앞에도 제법 넓은 주차장이 있습니다.

주차장에서 위쪽으로 절이 보입니다.

 

 

계단을 올라가니 가장 먼저 보이는 대양루

 

 

대양루는 다솔사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건물로 영조 34년(1758)에 지었습니다. 

아래쪽 기둥은 나무를 다듬지 않고 뒤틀어진 채로 그대로 사용했고

위쪽 기둥은 잘 다듬은 나무로 세웠습니다. 

 

다솔사는 신라 지증왕 4년(503) 연기조사가 지었는데

처음에는 영악사라고 하다가 선덕여왕 5년(636) 타솔사로 바꾸었다네요.

문무왕 16년(676) 다시 중창하며 영봉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신라 말 도선국사가 건물을 더 지은 뒤 다솔사로 바꾸어 불렀다 합니다. 

고려 말 나옹선사가 절을 크게 증축했지만 임진왜란 때 불타 버렸고

숙종 때 중건했습니다. 

그 후 1914년과 한국전쟁 때에도 화재를 겪었습니다. 

 

 

 

 

 

 

 

대양루 쪽으로 올라가기 전 비석이 하나 보이는데,

숙종 때 다솔사를 중건한 뒤 그 내력을 적어 놓은 중건비입니다.  

 

 

 

그런데 중건비의 내용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영악사는 다솔사의 첫이름입니다.

그런데 지리산 영악사?

삼각산 조계사, 지리산 화엄사 하는 식으로

절 이름 앞에 산 이름이 붙는 건 알겠는데 이곳에서 지리산이라니?

 

그 답 역시 중건비 내용 속에 있습니다. 

 

"남쪽 바다에 닿아 있는 곤명은 그 진산을 지리산으로 하는데,

수백리 흘러 곤명 북쪽에 있는 봉우리를 맺은 봉명산에 절을 세웠다."

 

그렇다 합니다. 

 

대양루 옆으로 돌아 올라가니 대웅전이 보입니다.

응, 그런데 대웅전 현판이 적멸보궁입니다.

적멸보궁이란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법당을 말합니다. 

 

 

적멸보궁에는 불상을 모시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있으니 굳이 불상이 필요없지요.

법당 뒷쪽에 사리탑을 두고 예불을 드리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법당 안에서도 사리탑이 보이도록 벽을 뚫어놓은 것이 보입니다.

 

그런데 이곳 적멸보궁에는 와불을 모셔 두었습니다.

 

 

사리탑을 참배하기 전 물에 손을 담가 몸을 청정하게 한 후 오르라 합니다.

 

 

대웅전 옆에 극락전이 대웅전을 바라보며 서있고, 응진전은 대웅전과 나란한 방향입니다.

 

 

극락전은 서방정토의 부처님인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이고

응진전은 나한들을 모신 법당으로 나한전이라고도 합니다.

응진전에는 16나한을 모시는 경우도 있고 500나한을 모시기도 하는데 다솔사에는 16나한을 모셨습니다. 

이곳 응진전에서 만해 한용운이 머물며 수도했다고 합니다. 

 

대웅전에서 대양루를 마주보니 2층만 보입니다. 

 

 

왼쪽으로  종무소 건물이 보이는데 방장산 다솔사라 적어 놓았습니다.

방장산은 지리산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그럼 다솔사를 부를 때 봉명산 다솔사가 아니라 지리산 다솔사라 불러야 하나?

 

 

대양루와 종무소 건물 사이로 가니 같은 종류로 제법 굵은 나무 3그루가 서있습니다.

 

 

그 앞에 하얀 말뚝이 하나 서있길래 들여다보니

1939년 8월 29일 만해 한용운 선생이 회갑을 기념해 직접 심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 나무들은 황금공작편백나무라 합니다.

 

나무들 맞은편에 있는 건물은 안심료인데 

한용운 선생이 1917~1918년 이 안심료에 머물면서 독립선언서 초안을 작성하셨다는군요.

오호, 그럼 이곳이 독립운동의 성지인 건가요?

 

안심료 앞에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이라는 안내문이 보입니다.

다솔사가 만해 한용운을 중심으로 결성된 불교계 항일 비밀결사 만당卍黨의 근거지였다 합니다.

만당은 일본 도쿄에까지 조직을 확대했고, 

일제의 식민불교 정책에 대항해 불교 혁신과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합니다.

 

다솔사는 소설가 김동리와도 인연이 깊은 절입니다.

김동리는 20대의 젊은 시절을 다솔사에서 지냈다 합니다.

안심료에 머물며 광명학교 교사로 일했고,

만해 선생의 주례로 결혼도 했다는군요. 

 

김동리는 이후 1960~1961년에도 안심료에 머문 적이 있는데

이때 집필한 소설이 등신불입니다. 

 

절을 돌아나오며 아래쪽에서 올려다본 황금공작편백나무들

 

 

절 구경을 마치고 이제 봉명산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깁니다.

 

다솔사에서 봉명암 정상 지나 보안암석굴까지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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