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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방방곡곡

순천 왜성 답사 - <정왜기공도권>과 왜교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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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지역의 유일한 왜성이라는 순천왜성을 찾아갑니다.

순천 왜성은 순천에서도 남쪽, 광양만쪽의 율촌 산업단지 옆에 있습니다. 

 

왜성은 말 그대로 왜인들이 쌓은 성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각지에 성을 쌓으라고 했습니다.

일본에서 물자를 수송해 오는 보급 기지로 삼고, 조선 정벌의 전진기지로 이용하겠다 이거지요.

또 조선을 쳐들어오면서 내세운 명분이 정명가도, 즉 "명나라를 칠 테니 길 좀 빌려줘"였으니

그들 말대로 명나라까지 쳐들어가려면 중간 보급로와 연결 기지도 필요했을 테지요.

조선 북부까지 기세좋게 치고 올라갔다가 조명 연합군에 밀려 내려온 뒤에는 이 왜성에서 수성전을 펼쳤고요. 

그런데, 남의 나라에서 뭔 수성전?

 

그때 쌓은 왜성 중 상당수가 남부 지역에 남아 있습니다. 

대부분은 영남 지역(부산, 울산, 경남)에 남아 있고,

순천 신성리의 왜성은 호남 지역에 있는 유일한 왜성입니다.  

 

순천왜성은 정유재란 때인 1597년 9월~11월에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쌓은 것으로 

1만 3천 7백명의 병력이 주둔했다 합니다. 

외성과 내성 모두 겹겹이 둘러 쌓았는데 지금 외성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왜성 입구에 꽤 넓은 공터가 있습니다. 

바닥을 포장해서 정식으로 주차선을 그어 놓은 것은 아니지만 주차를 위한 공간임은 맞는 듯합니다. 

 

 

공터 한쪽에 큰 표지석에 그림을 붙여 놓았습니다.

<정왜기공도권> 중 순천왜성 부분을 재현해 놓은 그림입니다.

그런데 그림 앞에 왜 아무 설명도 없는 거지?ㅠㅠ

 

 

'정왜기공도'란 왜를 정벌한 공을 기념하는 그림입니다. 

구체적으로는 1598년 있었던 왜교성(순천왜성) 전투와 노량해전을 기록한 그림입니다.

'권'은 두루마리 그림이라서 붙은 글자.

 

 

 

<정왜기공도권>은 명나라 황실의 종군화가가 그렸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은 원본이 아니라 사진으로 전해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게리 레드야드(Gari K. Ledyard) 교수가 <정왜기공도권>을 찍은 사진을 확보해 1978년 공개했다고 합니다.

 

원본은 없지만 대신 정왜기공도를 병풍으로 만든 것이 전해집니다.

정왜기공도권을 6폭 병풍 2개로 그린 <정왜기공도병>이 그것입니다.

<정왜기공도병>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습니다.

영국의 고미술상이 소장하고 있던 것을 구입했다고 하네요.

 

정왜기공도병 중 오른쪽 상단 부분이 순천왜성 전투입니다.

 

정왜기공도병, 국립중앙박물관

공터 옆, 왜성 올라가는 초입에 연못(?)이 있습니다.

순천왜성에 있었던 해자의 흔적이라 합니다. 

 

 

순천왜성은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서쪽만 육지로 이어지는 곳에 자리잡았습니다.

지금은 주변이 매립되어 바다와 통하지 않습니다만......

 

외성과 내성을 겹겹으로 쌓고, 외성과 내성 사이에 바닷물을 끌어들여 해자를 만들었습니다.

 

왜성들은 방어 기능에 중점을 두어 쌓았는데,

강이나 바다에 인접한 독립된 구릉 혹은 야산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일본에서 배를 타고 건너오니 배가 닿는 곳이 보급과 연락에 유리했을 테지요. 

 

 

 

 

 

 

 

왜성 올라가는 초입의 안내문들

한글, 영어, 일본어로 되어 있습니다.

 

 

해자 흔적을 옆에 끼고 걷다 보면 처음 만나는 구조물, 성문이 있던 자리입니다. 

외성에서 내성으로 이어지는 중심 통로인 겁니다. 

지금 보는 모습과 달리 정왜기공도에는 성벽 위에 여장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출입로가 만조 때 멀리서 보면 다리처럼 보였다고 하네요. 

그래서 이 성을 왜교성倭橋城 또는 예교성曳橋城이라고도 했습니다. 

순천왜성은 또 한동안 승주 신성리성으로 불리기도 했다지요. 

 

일본에서 성을 쌓는 방식은 커다란 돌을 쌓아올리면서 잔돌로 그 틈을 메워 가는 것인데

임진왜란까지는 그 틈새에 회반죽을 바르거나 흙을 집어넣지 않고 돌만으로 쌓았다 합니다. 

 

 

이렇게 하면 성을 쌓는 속도가 꽤 빠르고,

혹시 공격을 받아 무너져도 흩어진 돌들을 다시 쌓아올리면 됩니다. 

 

하지만 돌틈으로 쥐 같은 작은 짐승이 드나들 수 있고 

식물이 자라면서 틈새를 무너트릴 수도 있어서 꾸준히 보수를 해줘야 한다네요. 

 

밖에서 볼 때는 여느 문과 마찬가지로 두 벽(?) 사이에 통로가 있는 구조 같은데

안쪽에서 길이 꺾여 있습니다. 

 

 

동쪽으로 탐방로가 이어집니다.

 

 

또 다른 문지가 나타납니다. 

앞서 본 문지처럼 두 벽 사이로 통로가 있는데

 

 

일직선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ㄱ자로 꺾어집니다.

 

 

두 번째 문지를 지나 남쪽으로 계속 갑니다.

 

 

탐방객용 화장실이 나오고 그 앞에서 길이 갈라지는데 어느 쪽으로 가든 상관없어요. 

일단 왼쪽으로, 시계 방향으로 돌아봅니다.

 

 

비탈 위로 성벽이 보입니다.

다시 성벽 사이 통로를 지나갑니다.

 

 

이제 순천왜성 안쪽에 들어온 것인가? 하며 들어갔지만 웬걸,

또 성벽이 있습니다.

 

 

비탈에 기대어 있는 성벽 옆의 이 시설은 수로일까요?

 

 

수로처럼 보이는 시설 위쪽으로, 다시 성벽 사이 통로로 들어갑니다.

도대체 성을 몇 겹으로 쌓은겨?

 

 

왜성은 평지부터 시작해서 정상까지 여러 구간으로 나누어 통행로를 미로처럼 만들고,

그 구간마다 성책과 성문을 설치하는 다층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함락시키기 어렵다고 합니다.

 

성벽이 뚫리면 그대로 성이 함락되는 우리의 일반적인 성보다 방어력이 강한 겁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 성곽은 성문이 열리든 성벽이 무너지든 한 겹만 부서지면 함락되는 구조네요.

 

 

 

 

 

 

 

 

 

 

왜성의 가장 안쪽 가장 높은 곳에 천수각天守閣 자리가 있습니다. 

천수각은 일본의 전통 성곽 건축에서 가장 크고 높은 누각을 말합니다.

 

 

순천왜성의 천수각 자리는 별로 크지 않습니다.

남은 기단(?)만 봐서는 우리나라 성곽에서 볼 수 있는 장대보다 약간 커 보이는 정도.

 

 

하지만 일본 성에서 천수각은 꽤 규모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일본의 대표적인 성으로 꼽히는 히메지성을 예로 보자면,

히메지성이라고 했을 때 흔히 보여주는 건물이 정확히는 히메지성의 천수각인 겁니다,

히메지성은 해자 안쪽의 모든 영역을 말하는 것이고요. 

 

일본 히메지성의 천수각

 

순천왜성 천수각 위에 서니 사방이 훤히 보입니다. 

왜장들은 이곳 천수각에서 주변을 살피며 전투를 지휘했습니다.

좁은 바다 건너 바로 광양입니다. 

 

 

동쪽으로 율촌산업단지가 보입니다.

 

 

율촌산단 북쪽에는 현대제철 순천공장이 있네요. 

 

 

본디 울산왜성 바로 옆은 바다였고, 일본군들은 이곳에 배를 대놓고 군사와 물자를 실어 날랐습니다.

그 바다가 지금은 매립되어 산업단지가 되어 있습니다.

 

천수각에서 맞은편 끝쪽에 깊게 파인 곳이 보입니다.

 

 

배수시설 혹은 저수시설 같은 건가? 하면서 가보니 비탈진 길이 있습니다.

또 다른 출입구인 모양입니다.

 

 

역시나 길이 꺾여 있습니다.

 

 

밖에서 보면 성벽이 곧게 이어지는 게 아니라 들쭉날쭉입니다.

 

 

이곳에서 길을 따라 내려가면 아까 양쪽으로 화살표가 돼있던 표지판 있는 곳입니다. 

 

순천왜성에서는 1598년 9월부터 조명연합군과 일본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순천왜성을 쌓고 주둔하며 그 일대에서 통치자 노릇을 하던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를 치기 위해

조명연합군이 육지와 바다에서 협공 작전을 펼친 겁니다.

 

육지에서는 명나라의 유정 제독과 조선의 권율 장군이,

바다에서는 명나라 진린과 조선의 이순신 장군이 군대를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맹렬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조명 연합군은 순천 왜성을 함락시키지 못했습니다. 

이때 명의 진린은 고니시의 뇌물에 넘어가 퇴로를 터주려 했다지요.

 

진린은 고니시가 요청한 통신선을 빠져나가게 해주었고

이순신 장군에게 왜군들의 퇴로를 막지 말자고 권했습니다.

 

하지만 이순신에게 그런 말이 통했을 리 없을 터!

 

고니시의 연락을 받고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등이 전선 500여 척을 이끌고 노량 앞바다로 집결했습니다. 

고니시는 이들과 조명 연합군을 협공하면서 퇴각하려는 생각이었다지요.

 

이때 벌어진 전투가 바로 임진왜란을 마무리하는 전투이자 이순신 장군이 순국하신 노량해전입니다. 

 

11월 18일 밤부터 이튿날까지 벌어진 노량해전에서 왜군은 크게 패해 겨우 50여 척만 남아 도망갔습니다.

고니시는 이 전투 와중에 빠져나가 일본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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