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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방방곡곡

비오는 날 찾아간 순천 초연정원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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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초연정원림을 다녀왔습니다.

 

여느 정자들과 달리 초연정에는 뒤에 원림이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원림은 집터에 딸린 숲

혹은 

정원이나 공원의 숲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건축물인 정자뿐 아니라 주변 경관까지 포함되는 건데,

누각이나 정자라는 게 본디 주변 경관과 함께여야 의미가 있는 것 아닌가?

 

명칭이 호연정이니 악양루니 해서 건물이름만 있는 경우와 

원림이 붙는 경우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일까요?

 

하긴, 모두가 ○○정이나 ○○루로만 불리는 게 아니라 소쇄원이나 광한루원 같은 명칭이 있는 걸 보면

뭔가 구분점이 있는 것 같긴 합니다. 

환벽'당'이나 명옥'헌' 같은 명칭도 있고요.

 

어쩌면 정자 이름 뒤에 붙은 원림이라는 말 때문에 가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생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초연정은 주암호 서쪽 모후산 자락에 있습니다.

 

초연정에 가던 날 비가 추적추적.....

하긴, 장마철이니 뭐 어쩌겠음ㅠㅠ

 

네비에게 길 안내를 부탁하니 순천 삼청리 마을 끝으로 데려갑니다.

 

다 왔다 싶을 때 옆쪽으로 차를 몇 대 세울 만한 공터가 보이는데, 네비는 계속 진행.

뭐지? 하면서 조금 더 올라가니

.

.

.

아이쿠, 초연정 뒤통수가 보입니다.

 

 

이곳에 순천 초연정에 대한 안내문이 하나 서있고, 마을 이름에 대한 소개도 있습니다.

1914년 유경리와 왕대리를 통합해 삼청리라고 했는데

삼청은 수청, 풍청, 월청이라는 그런 내용.

수청은 물이 맑다, 풍청은 바람이 시원하다, 월청은 달이 밝다

그런 뜻이겠지요.

 

 

밑으로 내려갈 수 있는 길이 있긴 한데 

바위투성이에다 이끼가 잔뜩 껴있어 미끄러워 보입니다.

비까지 내리는데 말이지요.

 

 

방금 전 왼쪽의 그 공터가 초연정 주차장 맞았네요.

 

공터에 차를 대고 작은 길을 따라 내려갑니다.

여름이라 나무에 잎이 가득하고 비까지 내리니 뭔가 더 울창한 느낌입니다.

 

계곡이 흐르는 옆으로 높이 쌓은 축대 위에 초연정이 보입니다.

정면이 3칸짜리인 건물이네요.

 

 

주변에 바위가 무척 많습니다.

축대 밑을 빙 돌아서 왼쪽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습니다.

 

 

이렇게 초연정 옆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정자 옆에도 안내문이 있는데

아까 뒤쪽에 있던 것과 같은 내용이지만 조금 더 자세합니다.

 

이곳은 원래 대광사라는 사찰의 승려가 수석정을 세우고 수도하던 곳이라 합니다.

순조9년(1809) 조진충이 중창하여 옥천조씨의 제각으로 사용하다가 

이후 조진충의 아들인 조재호가 1880년에 중건하였고

고종 25년(1888) 송병선이 ‘초연정’으로 바꿔 불렀다네요.

 

 

바로 앞에 산봉우리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초연정은 계곡 안에 들어앉아 있어 여느 정자들과는 달리 탁 트인 맛이 없습니다. 

 

 

대개 정자 혹은 누각은 강변이나 언덕, 탁 트인 계곡에 지어 경치를 감상하기 좋은데

초연정은 모후산 계곡 안에 숨어 있는 특이한 경우입니다. 

모후산 계곡이 초연정의 '원림'이 되어 주는 셈입니다.

 

정자 앞에 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습니다.

숲이 울창하면 맑은 날에도 그늘이 많이 지는데 날까지 궂으니 많이 어둡습니다.

 

 

정자에서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위치긴 한데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습니다. 

경치 감상보다는 물소리 듣는 걸 주제로 한 정자라고나 할까....

눈으로 보는 경치가 아니라 귀로 듣는 경치인 건가요?

 

 

반대쪽 측면에는 뭐가 있나 싶어 가봅니다.

 

 

난방을 했던 듯 아궁이가 있습니다.

늘 거주하는 살림집이 아니고 휴식처로 사용하던 곳일 텐데

여름에 와서 더위를 식히는 것뿐 아니라 겨울에도 이용을 했나 봅니다.

 

 

자연석을 주춧돌로 쓰면서 그에 맞춰 기둥을 깎아 올렸습니다.

이런 걸 그렝이 기법이라 할 겁니다. 

 

 

축대 아래쪽에도 바위가 많았는데 집 주변이 온통 바위투성이네요.

 

 

안내문에 의하면 "계곡의 암반에는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잠시 머물렀다고 전하는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저로서는 공민왕이 피난한 일이라면 안동부터 생각납니다. 

안동 놋다리밟기의 유래가 공민왕과 관련이 있다잖아요. 

노국공주와 함께 안동으로 피난을 왔을 때 개울을 건널 수 있도록 마을 부녀자들이 허리를 굽혀 다리를 만들어 줬다는 이야기요. 

 

그런데 순천에도 피난을 왔었나 봅니다.

개성에서 안동과 순천은 방향이 영 다른데.....종횡무진하셨나?

 

그나저나 설명이 뭐 이리 애매한지 모르겠습니다. 

 

그 흔적이란 게 뭘 말하는지 명확치 않습니다.

바위에 공민왕 피난과 관련된 글자가 새겨져 있다는 것 같은데

당시에 공민왕이 새기고 갔다는 건지

후대 사람들이  그 일을 바위에 새겼다는 건지.....

아마도 후자인 것 같습니다만.

 

계곡으로 가서 그 흔적을 찾아보고 싶은데 상황이 마땅치 않습니다.

계곡에 들어갔다 물에 젖는 거야 그러려니 하지만 

그늘진 계곡인데다 비까지 내리니 바위가 심히 미끄러워 보입니다. 

 

어우, 잘못 넘어지면 어디 한 군데 부러지겄어.

 

아쉽지만 계곡 답사는 포기합니다.

 

계곡 앞에서 망설이다 뒤를 돌아 초연정을 다시 바라봅니다.

바위들이 정자의 풍광을 살려주는 것 같네요.

 

 

비오는 날에는 그 나름의 풍치가 있으니 그러려니 하고 다니지만

계곡을 못 올라가본 건 못내 아쉽네요.

언제 맑은 날 그리고 물이 적은 날 와서 제대로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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