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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방방곡곡

남원시내 유적지 몇 곳 : 남원부관아터, 남원석돈, 용성관, 유애묘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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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시내를 걸으며 역사의 흔적 몇 곳을 더듬어 봅니다.

 

 

먼저, 남원 관아가 있던 곳입니다.

남원문화원 앞에 남원부 관아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행정구역은 8도를 기본으로 각 고을은 부, 목, 군, 현으로 나뉘었는데

남원은 도호부였습니다.

남원을 책임지던 지방관은 종3품인 도호부사로, 춘향전의 주인공 이도령이 바로 남원부사의 아들이었지요.

이도령은 남원부사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왔다가 춘향이를 만난 것^^

지방에 온 관리들은 내아(지금으로 치면 공관)에서 생활했으니

이도령도 이 자리 어디쯤에서 글공부를 하다 광한루로 놀러 갔을 테지요.

 

 

그런데 이도령이 단옷날 좀 멀리로 놀러간 건 줄 알았는데

실제로 남원부관아터에서 광한루까지는 생각보다 가깝네요.

직선 거리로 500미터 남짓입니다.

그래도 광한루가 성문 밖에 있었으니 지금과는 거리감이 달랐으려나요?

 

남원부 관아가 있던 남원문화원에서 왼쪽으로 마주 보이는 곳에 남원우체국이 있는데,

이 우체국을 끼고 도는 모퉁이에 남원부석돈지가 있습니다.

 

 

석돈이라면 돌로 쌓은 돈대라는 건데,

돈대라고 하면 군사시설부터 떠올라서 이곳은 뭐지 했더니

<용성지>에 당산신을 섬기는 장소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남원고을 수호신을 위한 제사 유적.

 

본디 수풀이 우거졌던 곳인데 

관공서를 짓는다며 석돈을 헐어서 돌과 흙을 사용했다 합니다.

그러다가 1986년 지금의 남원우체국 건물을 지을 때 일부 복원해 놓은 것이라 하네요. 

 

남원석돈을 옆구리에 끼고 있는 남원우체국은 1986년 지은 건물인데

남원에서 체신업무를 시작한 지는 100년을 한참 넘었습니다. 

 

 

남원우체국 앞에 있는 우체국개국 100주년 기념비에 의하면

1896년 남원우체사라는 이름으로 처음 개국했다 합니다.

 

 

남원우체국에서 대각선으로 마주보이는 곳에 용성초등학교가 있는데

이곳은 용성관이 있던 자리입니다.

 

 

용성관은 신라 신문왕 때인 691년 처음 세웠고 조선시대 남원부 객사로 쓰였다는데

애초에 용도는 무엇이었을까요?

 

 

 

 

 

임진왜란 때인 1597년 남원 전투에서 패하자 병마사 이복남이 용성관을 통째로 태웠다고 합니다.

용성관에 태조를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있었는데

남원성을 점령한 왜군에게 능욕당할 것이 뻔하니 이것을 염려해 불태운 것이라지요.

용성관은 이후에 다시 지었다가 여러 차례 불에 타 다시 지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에 객사 자리는 학교 터로 사용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학교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용성관 건물은 전쟁 때 불에 타버렸고 지금은 기단 일부와 계단석물 1기만 남아 있다는군요.

 

광한루, 관왕묘와 더불어 남원의 3대 고건물로 불리었다는데

학교 이름이나 거리 이름 등에 여전히 용성이란 말이 많이 사용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남원읍지도 용성지라는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유애묘를 보러 갑니다.

유애묘는 남원부사를 지냈던 김희를 기리는 사당입니다.

 

 

유애묘를 보려면 남원교육문화회관으로 가면 됩니다.

지도만 보면 용성초등학교 앞 골목길로 들어가도 될 것 같은데,

그쪽은 담장으로 막혀 있습니다.

 

 

남원교육문화회관과 수영장(체육센터) 사이로 가면

 

 

유애묘 앞 작은 문이 보입니다.

다행히 문이 열려 있다 싶었지만.....

 

 

역시나 사당 문은 굳게 잠겨 있습니다ㅠ.ㅠ

 

 

김희에 대해서, 세종대에 남원부사로 재직중 돌아가셨다는 것 말고 생몰연대는 알 수 없습니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야 기록이 없는 경우가 많지만

이 분은 부사까지 지냈던 사대부이고

선정을 펼친 덕을 기려서 백성들이 사당까지 세워줄 정도인데도 기록이 없다니 

안타까움 이전에 희한하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유애묘는 임진왜란 중인 1597년 불에 탄 것을 영조 때 다시 지었다 합니다.

 

비록 문이 닫혀서 담장 너머로 볼 수밖에 없지만,

안내판은 먼지가 잔뜩 끼어 잘 읽을 수 없지만,

그래도 사당이 방치되지 않고 관리는 되는 느낌이라 다행입니다.

 

 

남원부 관아, 석돈, 용성관, 유애묘 등은 남원읍성 안에 있던 곳들이고,

다음으로 남문 밖에 있던 관서당 남성재를 둘러봅니다. 

 

남성재는 광한루원의 북문 바로 뒤에 있습니다. 

 

 

광한루원 주변은 한옥 호텔인 남원예촌을 비롯해 새로운 시설들이 들어서고 거리도 정비되는 느낌인데

관서당 남성재 역시 말끔한 모습니다. 

 

서당은 옛날의 기초 교육기관인데 앞에 '관'자가 붙은 걸 보니 지금으로 치면 공립초등학교 정도 되겠죠.

남성재는 고종 때인 1875년 세운 서당으로

하급관리들의 아이들이 공부했다고 합니다.

남원에 관서당이 남성재, 성동재, 운봉관서당 3곳이 있었는데

지금은 이 남성재만 남아 있다네요.  

 

남성재 앞의 기념비를 보니,

일제강점기에 서당이 폐쇄되자 성남학원으로 바꾸어 고전문예를 가르치다가 

광복 후 다시 서당을 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미 근대교육체계가 자리를 잡았을 테니....)

결국 관서당 남성재는 문을 닫았는데

관서당 후손들이 장학사업 등을 펴다가 

남성재를 다시 정비해 2000년 지역문화재로 지정받았다는 그런 역사입니다. 

 

 

관서당 남성재를 활용한 교육활동이 뭔가 있는 건지,

아니면 문화재 건축물로서 방문객들을 맞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코로나 때문인지는 몰라도 조용한 느낌입니다. 

 

남원읍성 밖의 유적지로 관서당남성재 말고 또 뭐가 있으려나요?

 

광한루원이야 워낙에 전국적으로 이름난 곳이라 따로 다룰 만한 곳이고

저도 이미 포스팅한 바 있습니다.

 

춘항전의 무대 광한루원 보러가기

 

그리고 서문 밖 관왕묘가 있는데,

남원관왕묘는 따로 포스팅해 보겠습니다.

 

남원 관왕묘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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