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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방방곡곡

우도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나 : 우도 개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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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도는 늘 관광객들로 북적입니다. 2014년 3월 기준으로 우도 인구가 1,610명이라는데 연간 관광객이 100만 명을 돌파했다니 그야말로 우도에는 주민보다 관광객이 더 많이 돌아다니는 셈입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몰리다 보니 당연히 도항선 운영 수입이 늘었고 이로 인한 이해관계가 얽혀 재판까지 벌어지는 모양입니다. 판사들이 현장 점검을 위해 5월 22일 우도를 직접 방문한다고 하네요.  

 

 우도와 성산항을 오가는 배에서 본 우도

☞ 우도 도항선 관련 재판에 관한 기사 보기

 

 

 지금은 넘치는 관광객들과 이로 인한 이해관계로 재판까지 벌어지는 상황이지만 우도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우도에서 고인돌이나 동굴집자리흔적 등이 발견되는 걸 보면 사람이 아주 안 살았던 건 아닌데, 언제부턴가 무인도로 남았던 듯합니다. 

 

<남사록>(1602)과 <탐라지>(1653)에 보면 우도에 닥나무가 많이 자란다는 내용이 보이는데

사람이 상주하지는 않아도 가끔씩 건너가 닥나무를 베어다 썼던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숙종 23년(1697) 제주목사 유한명이 우도에 처음으로 말 200여 필을 방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도에 목장이 설치된 후에도 목자들이 말을 돌보러 드나들 뿐 상주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1702-1703년 제주목사를 지낸 이형상이 우도를 점검했을 때에는 말이 262필이었고 이를 돌보는 목자와 보인保人이 23명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형상 목사는 이 목장을 관리감독하는 사람이 없다며 별방진 조방장에게 감목관을 겸임하게 합니다. <남환박물>에 그 내용이 보입니다.

 

지금 계미년(1703년)에 소섬에 방목한 말을 감독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나는 계청하여 별방진 조방장으로 감목을 겸임하게 하고 기르는 것을 살피도록 하니, 조정에서 이를 허락하였다.

 

이형상이 새로 설치된 우도 목장을 점검하러 가려고 하자 백성들이 모두 말렸다고 합니다. 우도의 어룡굴에 신룡이 사는데 사람이 가까이 가면 해코지를 한다는 것이었지요. 어룡굴은 지금 동안경굴이라고 부르는 곳인데, 당시 사람들은 이곳에 신룡이 산다고 믿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 맞은편인 오조리에도 사람들이 상주하지 못하고 고기잡이 때만 잠깐씩 머물렀다고 합니다.

물론 이형상 목사는 이런 말을 모두 무시한 채 우도에 갔고, 그 날은 날씨가 쾌청했던지 별탈 없이 목장 점검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탐라순력도 중 우도점마를 보면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탐라순력도에 그려진 우도의 모습이 꼭 소가 물 속을 걸어가는 것 같지 않나요?^^

 

우도점마 그림은 탐라순력도 소개 홈페이지에서 가져왔습니다.

☞ 탐라순력도 소개 보러가기

 

그 후로도 100년 넘게 사람이 살지 않던 우도가 개간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들어서입니다. 

순조 23년(1823) 제주위유어사 조정화가 우도 개간을 허락해 달라고 조정에 요청한 내용이 순조실록에 보입니다.

 

[순조실록 23년 2월 24일 기사]

제주의 위유어사 조정화(趙庭和)가 복명하고 별단을 올려, 우도 목장을 백성이 개간하도록 허락할 것과 섬의 남녀가 내지와 왕래하며 혼인할 수 있게 할 것과 목사의 전최(殿最)를 도백으로 하여금 마감하게 할 것과 사신 접대의 폐단을 바로잡을 것 등을 아뢰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위 내용 중 "섬의 남녀가 내지와 왕래..." 하는 것은 제주도의 출륙금지령을 풀어달라는 내용 같군요.

출륙금지령에 대해서는 조만간 포스팅할 예정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는 건 의정부에서 일을 처리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우도를 개간해도 좋다는 허락은 20년 후인 헌종 8년(1842)에야 떨어졌습니다.

이원조 목사는 우도와 가파도에 방목하던 가축들을 다른 목장으로 옮긴 뒤 백성들에게 그 땅을 개간하도록 했다는데, 그러니까 우도와 가파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같은 시기인 셈이네요. 

 

헌종 10년(1844) 김석린 일행이 우도에 입도하여 정착하였고

1900년에 향교 훈장인 오유학이 마을 이름을 연평리라 명명했다고 합니다.

그후 섬에 들어온 주민들은 곳곳에 자리잡으며 영일동, 비양동, 고수동, 전흘동 등 8개 마을을 이루었습니다. 

우도는 꽤 오랫동안 연평리라는 이름으로 유지되다가 1986년 북제주군 우도면으로 승격되면서 서광리, 천진리, 조일리, 오봉리 4개 리로 나뉘었습니다.

저로서는 우도에 다니면서도 서광리니 천진리니 하는 이름보다 하고수동이니 하우목동이니 하는 이름이 더 익숙한데, -동자가 붙은 것은 각 리 안에 있는 자연부락 이름입니다.  

  

우도의 하우목동항. 우도에는 이곳말고 천진항으로도 배가 다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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