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지나다니는 길에 있는 것을 모르고 지나치는 수가 있습니다.
지리산 기슭에 퇴수정이라는 정자가 있다길래 위치를 찾아보니
세상에나
수십 번은 지나다녔을 길 옆에 있는 겁니다!!
그리하야,
새삼스럽게 다녀온 지리산 기슭의 퇴수정입니다.
퇴수정은 남원 산내면, 일성 지리산 콘도 들어가는 초입에 있습니다.
콘도 쪽으로 꺾어지기 직전
큰길에서 바로 정자 쪽으로 진입하는 입구가 있습니다.
큰길 바로 옆이라 정자가 있을 거라 생각을 못했을 위치네요.
작은 길을 따라 내려갑니다.
몇 걸음 가지 않아 기와지붕이 보입니다.
길을 내려서며 오른쪽으로 퇴수정이 보입니다.
작고 소박해 보이는 정자네요.
퇴수정 현판
'퇴수'란 무슨 뜻일까요?
물러나 수양한다, 그런 뜻인가?
퇴수정은 공조참판을 지낸 박치기朴致箕가 1870년 지은 정자입니다.
벼슬에서 물러나 심신을 단련하고 풍류를 즐긴다는 의미에서 퇴수정退修亭이라 했다네요.
짐작이 얼추 맞은 셈^^
정자 안에 작은 방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퇴수정 옆에는 관선재라는 집이 있습니다.
사당이자 독서하는 곳으로 박치기의 후손들이 세웠다 합니다.
대문이 잠겨 있어 관선재를 가까이에서 볼 수는 없었네요.
그런데 관선재 이름이 자료마다 觀仙齋라 되어 있습니다.
퇴수정 앞에 있는 안내문에도 그렇고요.
어떤 곳에는 신선을 본다는 의미라는 설명까지 붙여 놓았습니다.
그런제 정작 현판에는 觀善齋라 적혀 있습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무릇 정자 앞에는 물이 흐르게 마련!
퇴수정 앞에는 람천이 흐릅니다.
지리산 고리봉에서 발원해 운봉을 지나온 물줄기입니다.
정자 앞으로 물 가운데 작은 산모양 바위가 보입니다.
바위 한쪽에 야박담이라 새겨져 있습니다.
야박이란 밖에서 밤을 지낸다는 뜻인데,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하면 외박 같지만 그보다는 노숙(응?)에 가까운 뜻 아닐까 싶네요.
야박에는 밤중에 배를 정박시킨다는 뜻도 있는데,
바로 이 뜻으로 쓴 풍교야박楓橋夜泊이라는 시에서 따온 글자입니다.
풍교야박은 중국 당나라 현종 때의 장계張繼라는 사람이 지은 시입니다.
두보나 이태백은 알아도 장계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보는데,
많이 알려진 시인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풍교야박이라는 시가 공전의 히트를 쳤다는군요.
풍교야박은 밤이 되어 풍교에 배를 정박하다, 그런 뜻입니다.
풍교는 장쑤성江蘇省 쑤저우蘇州 서쪽 교외에 있는 다리 이름입니다.
중국에는 고대부터 운하가 꽤 발달했고, 제법 먼 거리까지도 운하를 통해 이동하곤 했습니다.
운하에는 곳곳에 다리가 있고, 풍교는 그런 다리 중 하나입니다.
장계가 풍교야박을 지은 것은 과거 응시생 시절입니다.
장계가 세번째인가 과거 시험에 떨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풍교를 지나게 됩니다.
날이 저물어 배를 더 이상 운항할 수 없으니 풍교에 정박하게 되는데
노자가 넉넉하면 어디 숙소에 들어가 편한 잠자리를 마련하겠지만
장계는 연달아 과거에 떨어진 가난한 선비 처지에 그러지도 못하고 배에 머물게 됩니다.
안 그래도 마음이 싱숭생숭했을 장계인데 마침 근처 한산사의 종소리가 들려옵니다.
장계가 그때의 심정을 시로 읊은 것이 바로 풍교야박!
月落烏啼霜滿天월낙오제상만천
江楓漁火對愁眠강풍어화대수면
姑蘇城外寒山寺고소성외한산사
夜半鐘聲到客船야반종성도객선
달 지고 까마귀 우는 하늘에는 찬서리 가득한데
강가 단풍나무, 고깃배 등불 마주하고 시름 속에 졸고 있네
고소성 밖 한산사의
깊은 밤 종소리가 뱃전에 이르는구나.
이 시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고
청나라 때 강희제는 이 시를 몹시 좋아해 직접 풍교를 찾기도 했다는군요.
중국에 흔하디 흔한 다리 중 하나였던 풍교는 이 시 때문에 특별한 장소가 되었고
한산사 역시 유명세를 얻게 되었습니다.
한산사와 풍교는 지금도 중국인들이 많이 찾는 명소라고 합니다.
장계는 나중에 결국 과거에 붙었다 합니다.
기행과 유람을 주제로 하는 시를 많이 남겼다 하는데, 그 중 풍교야박이 가장 히트작인 모양입니다.
그런데, 시 내용 중 고소성 밖 한산사?
하동 악양에 고소성이 있고 그 아래 한산사라는 절이 있는데,
아마도 중국의 명소인 이곳에서 이름을 따온 듯합니다.
하기야, 악양이라는 지명부터가 그렇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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